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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Oct 23. 2020

빨래 널기

박사학위를 받고 모 대학교 연구팀에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내리던 비가 그쳤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날씨였다. 연구실에 갈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반짝이는 해를 보니, 아차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 싶었다. 그러면서 짜증이 났다. 하루의 가장 좋은 때, 빨래를 널기도 연구를 하기에도 가장 좋은 하루의 그때.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빨래를 널었다. 그러면서 난생처음으로 내가 노예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에 빨래를 널지 않으면 남편은 빨래에서 냄새가 난다고 투덜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은 알까 싶었다. 내 하루의 가장 좋은 때를 투자해야 빨래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인생의 가장 좋았던 그때,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좋은 때 내 인생은 뒤죽박죽이 되어 지나갔다. 인생의 가장 좋은 때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내 연구는 한없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좋은 때에 연구를 했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아기는 게임에 몰두했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는 날에도 하루의 가장 좋은 때에 빨래를 널면서 느꼈던 조급함이 다시금 밀려와서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결혼하고 출산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날의 가사 노동부터 해야 했다. 논문 작성이나 강의 준비를 위해서는 먼저 가사 노동을 해야 했다. 가사와 일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힘겨웠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아이들을 학교나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 날의 가사 노동을 끝내고 나서 나의 할 일을 하기 위해 도서관이나 연구실에 가면 대개는 11시가 되었다. 9시부터 시작했다면 중요한 일을 끝냈을 만한 그 시간에 나는 하루의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어떤 날은 집안일이 손대기가 싫어서 공부하러 나가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전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기 싫어 그냥 둔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고 빨래를 널어야 하고. 이것 둘만이라도 하면 나가도 되는데 어떤 날은 그게 하기 싫어서 못 나가고 일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때는 나 자신이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았다. 전혀 성격이 다른 연구와 가사를 매일 번갈아 가면서 한다는 것이 많이 힘들었다.

박사학위논문 심사가 있는 날일지라도, 논문 심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가사 노동부터 해야 했다. 늘 시간이 부족했다. 하루의 시간이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 아이들 돌보고, 집안일하고, 연구와 강의 준비를 하고. 하루의 끝에 드는 느낌은 포도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포도주병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는, 지도교수님이 지시하시는 과업을 정해 주시는 기한 내에 마칠 수가 없었다. 늘 교수님께서 제시하신 기한에 어긋났고, 그러다 보니 박사학위논문을 마치는데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버렸다. 학위 취득이 늦어지니 그 이후의 일들도 늦어졌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녁에 집에서 아이들 저녁 차려주고, 밤에 다시 학교에 들어가서 자정이 너머까지 연구를 해야 했다.

일하러 가기 전에 급하게 빨래를 널어야 하는 날에는, 누가 빨래 너는 일만이라도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은 빨래 건조기를 많이 쓰는 것 같다. 빨래 건조기가 우리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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