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가스레인지 후드를 본다. 기름이 끼어 청소를 해야 할 것 같다. 후드 청소를 하려면 오늘 하루쯤은 가스레인지에서 요리 같은 건 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어디 가서 김밥이라도 사 오면 좋겠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도움을 받는 것은 도움을 주는 이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젠가 ‘기부의 배신’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부는 좋은 것이지만, 몇 가지의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기부는 기부하는 재화에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실어 보낸다. 기부는 자립을 위협한다. 기부는 대량 소비사회가 낳은 잉여의 처리 절차이다.”(안희곤, 2018). 공감 가는 이야기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 의미를 이제야 알겠다. 어머님의 수많은 도움들. 그것은 어머님마저도 인식을 하시지는 못했겠지만, 집에서 밥을 해서 먹어야 한다는 가치를 깔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바쁠 때조차 외식이나 매식보다는 집에서 밥을 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
내가 너무 바쁠 때에는 부엌에서 설거지거리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요리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외식을 하든가 시켜 먹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매 주말마다 반찬을 해다 주셨고 나는 내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밥을 해서 그 반찬이랑 식사를 준비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첫째가 돌 무렵이었을 때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때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분에게 첫째를 맡기기로 했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 당신께서 와서 봐 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서울로 강의를 들으러 가는 날에는 어머님이 오셔서 아이를 봐주셨다. 그리고 당시에는 새마을이 가장 빠른 기차였기 때문에 서울까지 왕복 7시간 이상이 걸렸다. 강의 다녀온 다음날 하루 종일 아이와 놀아주면서 병든 병아리처럼 졸기도 하고 하루 종일 멍했었다. 나머지 일주일 내내 나는 아이를 내가 돌보아야 했다. 아이가 잠이 들면 겨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님이 일주일에 한 번 내가 강의를 들으러 가는 날 오셔서 아이를 돌보아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긴 하지만 어머님도 인식하지 못하셨겠지만, 그런 방식의 도움은, 아이는 엄마가 돌보아야 한다는 가치를 깔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 어머님의 그런 도움들이 너무나 큰 사랑이고 희생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나는 행정학 수업을 하면서 관리를 가르친다. 그런데 정작 나는 한 번도 관리자였던 적이 없다. 내가 관리자 마인드를 가져야 했던 것이다. 어차피 가정 살림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직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런 조직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고. 나는 사람을 고용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 인내가 부족했던 것 같다. 도우미가 정말 이따금씩 와서 청소를 하고 간 날, 남편이 하는 잔소리가 싫었다. 그것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가끔 아이를 돌보기 위해 부른 사람이 내 맘에 들지 않을 때 나는 맘이 상했다. 그것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도우미의 도움을 받기에는 나의 소득이 적었던 것 같다. 소득이 제한적이어서 좀 더 과감하게 가사노동의 외주화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맞벌이 여성의 경우, 자녀에 의한 가사 수요 증가와 근로형태에 따른 가사 공급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성 스스로 이를 해결하는 내재적 방안의 선택 정도가 높아 외재적 방안을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즉, 가구소득(구매력)과 여성 소득비(협상력)의 증가가 가사서비스 구매 등과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 취업여성의 낮은 임금 수준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가구에서 남성과의 가사를 배분하기 위한 협상력은 물론 가사서비스 구매에 필요한 구매력을 갖기도 어려운 수준이다.”(이진우·금현섭, 2017).
어머님이 주말마다 반찬을 가져다주실 때 나는 거절해야 했다. “어머님, 반찬을 해다 주시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고 거절하는 게 옳았다.
그럼 우리는 왜 그랬을까. 우리의 그 방식은 지금에 와서야 여러 방식 중 하나로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에게 그 방식은 유일한 방식이었다. 문화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말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가끔 나는 화가 나는 것이 있는데, 내가 한 많은 선택들에 대해서 내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결혼을 한다는 것, 아이를 낳는다는 것, 그리고 박사과정과 아이 양육을 병행한다는 것 등 내가 한 수많은 선택의 의미를 난 잘 몰랐다. 그 의미를 알았더라도 난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았더라면 어떤 측면에서는 그런 선택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림자에 대해서는 각오를 다지고 그림자에 대비하는 노력을 했을지 모르겠다.
어쨌건 국 한 가지를 끓이면서도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 동안 며느리를 위해, 요리를 해 주신 어머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스스로가 요리를 하기 힘들 때 활용해 볼 수 있는 옵션들은 뭐가 있을까. 요즘은 온갖 다양한 소포장 냉동포장음식이 있어서, 굳이 오랜 시간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변화한 세태라고 하겠고, 잘 활용하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아내와 남편의 당번제를 활용해 볼 수 있겠다. 전경일은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에서 아내와 남편이 주중에 당번제를 활용해서 가사노동을 함께 해 나갔음을 밝히고 있는데, 좋은 방법인 것 같다(전경일, 2005). 그리고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우리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는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참고문헌>
안희곤 (2018). 기부의 배신. Vogue, 2018.7.13.
이진우·금현섭. 2020. 맞벌이 여성의 삶의 만족도에 관한 연구-가사부담과 성 역할 인식을 중심으로. 가족과 문화, 제32집 1호 pp.34-69.
전경일 (2005).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