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지황을 찧어서 손에 발라 달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첫 째 아이가 돌 무렵이었을 때, 남편은 가볍게 손을 다쳐서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남편이 손을 다쳤고 남편은 퇴근해서는 나에게 생지황을 찧어서 손에 발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생지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박사과정 입학시험이 코앞이어서, 남편이 퇴근해서 아이를 좀 봐준다면 나는 공부를 좀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랬다. 내 결혼생활은 그랬다. 남편은 내게 늘 모순된 요구들을 동시에 쏟아내곤 했다.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그러면서 세탁은 세탁소에 맡기지 말고 직접 세탁하라고 하고.
가사노동과 관련한 남편의 요구는 정희진이 지적하듯이 이중 구속 메시지(double bind message)였다. “‘정숙하면서도 섹시해야 한다’는 예처럼 한국 사회에는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여성에 대한 모순적인 요구가 흔하다. 이는 곧 여성이 남성을 위한 기능으로 간주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성들은 저항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기도 한다.”(정희진, 2016, 117).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남편의 모순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남편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일은 불가능했고 늘 남편은 나에게 인상을 썼다.
남편과의 결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빠는 나에게 한 가지 중대한 조언을 해 주었다. “남편이 만약 너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하라.”는 것이었다. 결코 쉽게 남편의 폭력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다시는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오빠의 조언을 들을 당시에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 조언이 불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에서 남편의 폭력은 혼수 정보나 첫날밤 치르는 법처럼 결혼 전에 미리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아니다.”(정희진, 2016, 188). 그러나 결혼생활을 한참 하고 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가정폭력에 대한 공부가 결혼 전에 필요했던 것 같다.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에서 내가 가장 자주 경험한 폭력은 남편의 통제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일은, 남편이 나의 행동을 자꾸 통제하려고 하는 점이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못하게 하거나, 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내가 어떤 일을 남편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하려고 하면 나에게 심하게 저주를 퍼부었다.
서울에서 대학원 지도교수님과 동문들이 모이는 모임에도 내가 참가하는 것을 남편은 싫어했다. 밥 한 끼를 먹으러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야 하냐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번 돈으로 소파를 하나 사는데도 나는 목숨을 거는 정도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셋째가 태어난 직후, 친한 박사가 쓰고 있었던 보고서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 작업의 대가로 약간의 돈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가구점에 갔고, 마음에 드는 소파를 하나 골랐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로 소파를 사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소파를 사 오면 칼로 잘라 버리겠다.”라고 했다. 남편은 소파를 사용하면 허리에 나쁜 영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파 사는 것에 반대를 했다. 나는 남편이 너무 무서워서 내가 너무나 사고 싶었던 소파를 사 올 수가 없었다.
그 이후 거의 10여 년이 지난 이후, 남편이 중국 여행을 간 사이에 나는 소파를 집에 사 들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남편은 부엌으로 가더니 칼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칼로 소파를 베는 시늉을 했다. 다행히 남편은 소파를 칼로 베지는 않았지만, 한참을 씩씩거렸다.
나는 소파가 필요했고, 꼭 사고 싶었고, 내게 소파를 살 돈도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가 가진 신념에 따라 소파를 사지 말라고 나에게 지시했다.
난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마다 남편이 내뱉는 저주에 가까운 부정적인 말들을 듣고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남편이 원하는 대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극복해야만 했다. 영국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나는 남편의 반대에 직면했었다. 내가 몰던 차를 엔진 고장으로 처분한 뒤 나는 차가 필요했지만, 남편은 우리 형편에 차 두 대를 굴리는 것은 어렵다고 결론짓고 차를 사지 않았다. 멀리 강의를 가야 했던 나에게 차는 너무도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남편이 반대했기 때문에 차를 사지 못했다. 그러면서 드디어는 내게 과연 차가 필요한지조차 잘 모르겠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 같고, 남편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 같은 것이다. 내가 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점점 잊어갔다.
나는 다시 욕망하려고 한다. 내게 필요한 승용차를. 남편은 우리 형편에 차 두 대를 굴릴 수 없다고 하고, 내가 차를 잘 관리하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리지만. 나는 차를 꼭 마련해야겠다.
<참고문헌>
권진숙·박시현 (2019). 데이트 폭력 여성 피해자의 강압적 통제 경험. Journal of Korean Academy of Nursing, 49(1), 46-58.
그레이엄, 롤링스, & 릭스비 (2019). 여자는 인질이다(유혜담 역. 원저 Loving to Survive by Dee L. R. Graham, Edna I. Rawlings & Roberta K. Rigsby, 1994). 열다북스.
연합뉴스, 2018년 6월 25일. “가정폭력특별법 20년... 신체폭력 10분의 1로 줄어.
정희진 (2016). 아주 친밀한 폭력. 교양인.
주간조선, 2018년 7월 9일.
한국 여성의 전화 엮음 (2017).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도서출판 오월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