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성적표 붙었어!!"
이 한마디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우르르 복도로 몰려간다. 게시판까지 뛰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 심장은 튀어나올 듯 거세게 내달리고 온 몸엔 바짝 힘이 들어간다. 위에서부터 빠르게 이름을 훑고 나면 결과에 따라 그날 하루 천국일지 지옥일지가 결정된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치르고 나면 게시판에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 이름이 적혔고 나는 맨 위에 자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게시판에 상위 몇 % 의 등수가 공개된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90년대에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치 인생의 목표가 1등 옆에 자리한 내 이름을 보기 위한 것처럼 공부를 했다.
1등을 하는 날은 천국이다. 종일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과 선생님들의 칭찬을 들으며 우쭐댈 수 있고 하교하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가 소식을 알리면 엄마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섯 형제 중에 막내인 나만 공부를 잘했기에 1등을 해야 힘들게 살아온 엄마에게 효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등을 놓치는 날은 지옥이다. 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나 혼자 수치스러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1등을 뺏어간 경쟁자 친구를 죽도록 미워했다.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 거의 없다. 학교는 전쟁터였고 공부에 방해가 되는 친구는 사귀지 않았다. 학교와 집, 도서관, 학원을 오가며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참 열심히도 했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야만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학비를 면제받았으며 상위 몇 % 특별반의 보충 수업을 받는 등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오로지 성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던 잔인한 시기였다.
1989년에 개봉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는 전교 1등을 하던 여학생이 유서를 쓰고 자살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유서에 쓰였던 한 줄이 바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이다. 행복이 성적순이라면 줄곧 1,2등을 했던 나는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함이 마땅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닌 나의 꿈, 더 나은 나를 위한 공부를 했다면 어땠을까?
경쟁이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학창 시절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타인의 성공과 행복은 곧 나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 굳이 경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수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트리며 행복과 멀어지기도 한다.
"저 사람은 잘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언제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나 역시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부러운 동시에 의욕이 사라지며 자괴감에 들 때가 있다. 마치 내가 패배자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비교가 당연시되는 문화에 살아왔고 오랜 세월 그래 왔기에 습관처럼 된 것이다.
남을 이기는 것은 잠깐의 기쁨과 만족감은 줄지언정 오래가지 못한다. 학창 시절의 나는 다음 시험에서 경쟁자를 또 이겨야 하기에 더 치열하게 잠을 안자며 공부해야 했다. 사람들은 정상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바로 자신과 비교, 경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서 모임을 하는데 누구는 일주일에 2~3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보자. 그런데 나는 겨우 1권을 읽을까 말까 하는 상황이다. 이때 그 사람과 비교를 하면 내가 한참 부족하고 불성실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예전에 자신이 어땠는지 떠올리고 과거에는 책을 한 달에 1권도 못 읽었는데 이제 일주일에 1권이나 읽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남이 아닌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 그리고 남이 아닌 미래의 나와 경쟁해보자. 꾸준히 독서하는 습관을 들여서 한 달 뒤에는 일주일에 2권의 책을 읽고, 3개월 후에는 3권의 책을 읽는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 목표를 이룬 미래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미래의 나와 경쟁하는 것이다. 경쟁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타인이 아닌 자신과 경쟁하면 다른 사람은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가 된다. 함께 갈 수 있는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오랫동안 멀리 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자존감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찰리 맥커시의 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살면서 얻은 가장 멋진 깨달음은 뭐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것"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며 하루를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눈빛과 표정부터 다르다. 현재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 순간 충실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을 즐겁게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나로 충분하지만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일 또한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은가.
나는 지금 누구와 경쟁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