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차] 좋아하는 활동을 다이어리에 저축하자

40대 중년 여성의 다이어리에 쌓는 'digging'

by 땅콩

다이어리를 꾸준히 쓰고 피드백모임을 하면서 어떤 점이 크게 달라졌는지 한 분이 물으셨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를 소모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컸다.


물론 플래너 쓰기 초반엔 남의 기준에 맞춰 나의 업무를 분류하고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나의 시간을 치장하기도 했지만 ‘쓰기’는 내면의 작업이다. (다이어리 쓰기도 마찬가지) 솔직한 쓰기를 하지 않으면 지속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3개월이 지나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꾸준히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셀프칭찬도 하고 내 역할이 가진 시간의 밀도를 통계내면서 단단해졌다.



집안을 정돈해서 이 정도의 질서를 유지하고 가족들의 끼니를 차리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내는데 주 30시간을 쓰고 있었어요.

남편이 주 40시간 회사에서 일하고 오는 것처럼 제 역할도 유급노동 못지않은 노동시간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 이게 가장 컸죠.




4. 매월 초, 피드백데이

피드백 모임엔 10대 고등학생부터 2,30대 프리랜서, 40대 주부, 50대 자영업자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같은 40대라도 한 사람의 시간과 성취가 몇 개의 단어로 축약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피드백모임을 하면서 알았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엔 정답이 없고 삶이 다양하다고 해도 조명을 받는 인생은 몇 가지 맥락만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에 노출되어 있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역할이나 해내는 성취가 무가치하다고 느껴지기 마련이다.

내가 드린 형광펜에 시간분류명을 써서 활용하고 계신 G님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다. 그 시간 안에 적힌 활동이나 공백도 외면할 수 없는 나이자 끌어안고 살아야 할 나이다. 작심삼일도 못 버티고 쉽게 포기하는 연약한 나, 제대로 못해낼까 봐 시도조차 않으면서 다른 핑계로 그 시간을 허겁지겁 소비해 버리는 취약한 나는 나뿐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공부가 ‘인문학’이었다. 인간이 가진 취약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연민하고 잘 달래가면서 그 시간 중심에 나를 두는 연습을 타임플래너를 쓰면서 할 수 있었다. 사흘에 한번 달래 가며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덜 취약한 나, 과거보다 기특한 내가 될 수 있었다.

모임 구성원들의 다이어리 / 월 1회 모임을 하고 있다

몇 달 늦게 오프모임에 참석하게 된 Y님은 어릴 때부터 다이어리를 쓴 30년 차 고수였다. 다이어리 황금시대를 맞아 시중에는 다양한 플래너들이 즐비했다. 고수의 다이어리답게 우리가 쓰는 3P바인더 사의 다이어리보다 치밀하고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Plan] 구역과 [Do] 구역이 시간대별 너무 디테일해서 스케줄을 기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단점이었다. 바빠지면 기록을 놓게 된다고 하셨다. 일상의 밀도를 탄력적으로 계획하고 조절하기 위해 는 다이어리인 만큼 기록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자.

Y님이 몇 년째 쓰고 있는 O사의 다이어리_바쁜 주에는 아예 기록을 못하기도 한다

피드백 없이 쓰시고 계시던 Y님도 주간 회고페이지를 만들어 간단히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이 분은 수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밤잠시간을 기록했는데 잠을 잘 잔 날과 적게 잔 날의 컨디션, 일찍 잔 날과 늦게 잔 날의 컨디션 차이를 덕분에 알게 되셨다고 했다.


기록은 이렇게 나를 들여다보고 내게 맞는 방법을 시도해보는 계기가 된다. 일주일 피드백의 유용함을 몸소 느끼고 난 뒤 자녀들과도 피드백모임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5. 좋아하는 활동을 다이어리에 저축(?)하기

나는 [부업무] 시간을 탄력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주업무(가사노동)]는 주 20시간 내에서 해결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양육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과감히 [친목/관계]분류해 주업무에서 제외시키고 [자기 계발] 시간을 더 우위에 두었다.


내 통계를 보고 조금 놀라웠던 것은 내가 아무리 바빠도 일평균 3시간 정도를 자기 계발(독서, 글쓰기, 수강, 공부)등에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서너 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는 것인데 부업무가 150% 초과되어도 어느 정도 유지해 온 것이 신기했다. 아직은 모르겠다. 이것이 내게 어떤 보상과 효용을 가져다줄지. 다만 좋아하는 독서와 글쓰기, 자기 계발 관련 공부하는 시간이 다른 일과를 미루지 않고 안정적으로 안착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현재 나의 상황이 중요할 뿐 남들이 정한 '바람직한' 기준에 매달리는 건 나를 소모시킬 뿐이다. 세 아이를 키우며 안정적인 생활수준에 들어서자 내겐 몸컨디션, 즉 건강이 가장 큰 변수였다. 올해 즐겁게 임했던 활동을 내년에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내 생애주기가 중년으로 들어섰고 그것은 곧 기성세대, 보수화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돈을 쓸 때 우리는 충동구매를 염려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것을 넘어 이제는 가치소비를 한다. 조금 값이 나가도 그 경험이, 그 장소가, 그 물건이 내게 가치가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가족을 위한 시간, 취미를 위한 시간, 관계를 위한 시간, 소득을 위한 시간 등 20대보다 더 자잘하게 쪼개어져서 온갖 곳에서 내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보챈다. 이러니 중년의 시간은 더 빨리 흐를 수밖에 없다.


시간이 돈이라면, 한정되어 있는 자산이라는 인식이 생긴다면 50대를 위한 시간도 저축해야 하고 60대를 위한 시간을 위해 따로 자투리 연금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활기차게 활동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 저축한 시간은 1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계획하고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마흔 수업>을 쓴 김미경 작가가 40대에 꼭 시작해야 한다는 ‘디깅 digging’도 바로 그런 맥락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같은 맥락을 가진 것 같은 40대 여성이라도 실제로 우리는 많이 달랐다. 내가 가진 서사는 각각의 인간이 가진 상황들과 부분적으로 비슷할 수 있지만 나와 똑같은 일정을 보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개인'으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모임에서 많은 에너지를 얻어갈 수 있다.


우리는 다음 달 모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지치지 않고 조금 건너뛰더라도 12월까지 완주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일상에 쫓기듯이 바쁘게 하루를 채우지 말자. 자기 전 혹은 아침에 일어나 잠깐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일상의 밀도를 유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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