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우리의 학교를 온 이상, 책상에 엉덩이를 얌전히 붙이고 앉아 일 년을 보낸다는 것은 꿈도 꾸어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이곳의 학생이라면 주기적으로 학교를 박차고 나가 줄 것을 종용받기 마련인데, 1학기의 가장 큰 명분이 산악등반이었다면 2학기의 큰 명분은 바로 인문체험학습입니다. 10월에 접어들면 이 인문체험학습을 위한 준비로 학교가 다시금 바빠집니다. 전교생이 함께했던 산악등반과 달리 인문체험학습은 학년별로 행사명과 참여 프로그램이 달라지는데요, 1학년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2학년은 '도보여행'을, 3학년은 '농촌봉사활동'을 떠나게 됩니다.
오리엔테이션을 앞두고 우리의 학교에서 어떤 교육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던 것이 기억나나요? 이곳은 '자아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 가는 동시에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었죠. 이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에 맞게끔 1학년들의 인문체험학습 역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문체험학습 당일이 되면 1학년 학생들은 학교와 결연이 되어 있는 수련 시설로 향하게 됩니다. 이곳은 많은 학교들이 수련회 장소로 즐겨 찾는 청소년 수련원과 유사한 느낌인 듯 조금 다르죠.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산길을 오르다 보면, 산 중턱에 예상치 못한 평지가 나오면서 그 위로 얼핏 작은 리조트를 연상시키는 건물이 보일 것입니다. 사방이 단풍 물든 나무로 가득해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이 시설은 넓은 앞마당과 족구장 등의 운동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1학년 학생들은 이곳에서 3박 4일 동안 머무르며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체험하게 됩니다.
플레이백 시어터
수련 시설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강당으로 모이면 '플레이백 시어터' 시간이 시작됩니다. 플레이백 시어터는 3박 4일 일정의 가장 앞 순서로, 학생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새로운 장소에 대한 어색함과 긴장을 풀어 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맨 처음에는 모두가 손을 잡고 큰 원을 그리도록 선 뒤, 가벼운 무용 동작을 따라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다 점차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보다 어려운 동작을 시도하게 됩니다. 몸을 움직이며 긴장을 해소하고, 협응이 요구되는 동작을 통해 옆 친구들과 보다 가까워짐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죠. 무용을 통해 몸을 풀고 나면 이윽고 '시어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로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풀어내는 활동으로 넘어갑니다. 이때에는 학생들 중 누군가가 자신이 최근에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나 속상했던 이야기를 말하고, 다른 학생들이 즉흥적으로 연기를 통해 그 사연을 다시 풀어내는 과정을 거칩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자신의 사연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이켜보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더불어 연기를 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사연 속 감정을 모두가 생생히 느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소통의 방법을 배우게 되죠. 가능한 많은 학생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연극 시간이 여러 세션(session)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에 사연을 말했던 학생이 다음 세션에서 연기를 맡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전에 무대에 올랐던 학생이 다음 세션에서 사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무대가 펼쳐질 때는 여러 색깔의 천과 악기, 소도구들이 함께 제공되는데 학생들은 이를 즉석에서 활용하여 연극을 보다 실감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혼신의 연기를 펼쳐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만든 학생은, 이후에 이어질 일기 작성 프로그램 시간에 많은 학생들의 일기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발표 때 언급되기도 합니다.
자아를 성찰하는 글쓰기
글을 읽고 쓰는 활동을 정말 좋아하는 학교답게, 인문체험학습 프로그램에도 글과 관련된 활동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를 성찰하는 글쓰기'란 최근 나 자신에게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왔던 순간을 일기 형식의 글로 적고, 그 순간이 있기 이전의 마음과 이후의 마음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감정 조절법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각자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원하는 학생에 한해 돌아가며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3박 4일 내내 규칙적으로 열리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간혹 그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아이들이 싸운 일과 미안하다는 말로 일기를 채워 발표하고 서로 어색하게 화해의 눈빛을 보내는 경우도 드물게 있습니다. 선생님께 한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혼난 일에 관한 감정 변화를 일기로 쓰고 발표해서 선생님이 머쓱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기도 하죠.
프로그램 도중 영어와 일본어로 글을 써 보는 시간도 마련되곤 합니다. 동행하신 외국어 담당 선생님께 기본적인 회화 표현과 어법을 배우고, 이후 해당 표현과 어법들을 활용하여 짧은 성찰 일기를 써 보는 것입니다. 혹시 모르는 단어가 있다면 사전을 찾아 가며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도 됩니다. 이전에 시도해 보지 않았던 색다른 프로그램에 나름의 재미를 느끼는 학생들도 많지만, 당연하게도 발표의 난이도는 훨씬 까다로워지겠죠?
등산
우리의 학교는 글과 더불어, 산을 오르는 것도 정말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둘째 날 아침에는 수련원이 위치하고 있는 산의 등반 코스를 따라 등산을 합니다. 지리산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체력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코스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아침식사를 든든히 한 후 도시락과 몇몇 장비를 챙겨 숙소를 나섭니다. 산악등반 체력단련 기간에 지겹도록 연습했던 대형으로 앞뜰에 모인 뒤,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게 신경을 쓰고 열심히 산을 오르다 보면 점심 무렵에 정상에 도착하게 됩니다. 정상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잠시 땀을 식히고 주변을 둘러보면 단풍이 절정인 멋진 산의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을 맞으며 미리 챙겨 온 사과 등의 과일을 꺼내 먹는 학생들도 왕왕 보입니다. 이후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넓은 풀밭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나면 등산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입니다. 일종의 단풍 구경 느낌도 나는군요.
마음껏 뛰어놀아라!
'놀고 싶은 대로 노는 시간' 역시 나름 중요한 일정 축에 속합니다. 그 어떤 전자기기나 오락 시설도 없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두면 학생들은 저마다 바닥에 선을 그어 피구를 하기도 하고, 족구장에서 족구 경기를 하기도 하고, 동심으로 돌아가 술래잡기를 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넓은 바닥 하나와 여러 친구들만 있으면 얼마나 무궁무진한 놀이를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죠. 가끔은 학생들끼리 놀다가 작은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주로 어색한 시간이 조금 지속되다가 자아 성찰 일기를 쓰는 시간에 어느 하나가 그날의 일을 쓰면 화해의 장이 마련되곤 합니다.
이곳 수련원의 가장 큰 장점은 밥이 아주 맛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아침이 되면, 학생들 모두가 아쉬워하며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는 합니다. 보통 체험학습은 귀가를 하는 주말을 바로 앞두고 끝나게끔 일정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3박 4일 간의 일정을 마치면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2학년들이 떠나는 도보 여행은, 졸업생들이 3년 동안 겪은 인문체험학습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꼽을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프로그램입니다. 얼핏 국토대장정을 연상케도 하는 도보여행은, 그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각종 장비와 짐을 챙겨 도보로 여러 지역을 걸쳐 이동하는 활동입니다. 여행길에 오르기 전 사전 협의를 통해 차가 거의 다니지 않으면서 도보 이동을 하기에 적합한 시골길, 도로 등을 파악하여 적절한 지역을 선정하고 코스를 정합니다. 종종 지리산 둘레길처럼 트래킹 코스로 적합한 곳이 코스의 중간에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걸어서 지정된 숙박지로 이동을 완료하는 것이 매일의 목표입니다.
한눈팔 새가 없는 바쁜 걸음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과는 달리 도보여행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합니다. 산악등반과 마찬가지로 이동 중 사고의 위험이 있고, 도보 이동의 특성상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단언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도보여행 전 미리 조를 짜서 조장과 부조장, 그 밖의 임무를 담당하는 체계를 선정하고 이를 엄격히 지킵니다. 선두에 선 조장은 전방의 위험 요소를 잘 파악하고 안전과 관련된 구호를 제때 보내야 하며, 모든 조원은 구호를 잘 이해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이 과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생님들의 엄격한 질책이 뒤따르게 됩니다.
단순히 걷는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생각 외로 몇 킬로미터에 걸쳐 짐을 지고 이동하는 일은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몇몇은 굉장히 힘들어하고 또 가끔씩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평소에 데면데면한 사이의 친구였더라도 모두가 다가가 처치를 돕고 걱정하며 격려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점심은 길에서, 저녁은 숙소에서 먹는다!
전날 챙겨 둔 주먹밥 정도로 끼니를 가볍게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매일 점심 무렵이 되면 코스의 중간마다 미리 물색해 둔 취사가 가능한 야외 장소로 향해 그곳에서 밥을 짓습니다. 이제 야외에서 냄비와 물, 쌀만을 가지고 눈대중으로 밥을 짓는 일에는 도가 튼 아이들이 제법 생겨날 시기이기 때문에 취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각 조의 인간 압력밥솥들이 밥을 담당하면, 나머지는 국을 끓이고 반찬을 준비하며 점심상을 차립니다. 가끔 극한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조에서는 라면을 끓이는데, 라면 냄새가 참 매혹적이기 때문에 늘 다른 조의 하이에나들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라면을 끓이는 조에서는 편히 밥을 먹을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그날의 목적지인 숙박 장소에 저녁 이전까지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다시금 열심히 이동합니다. 제시간에 숙박 장소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대개 점심 메뉴보다는 저녁 메뉴에 주력하여 보다 호화로운 메뉴를 조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벤트성으로 요리 경연 대회가 벌어지기도 하는데, 각 조는 서로 요리 좀 제법 한다는 친구를 필두로 한정된 재료를 사용해 가장 맛있고 보기에도 좋은 최상의 요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이때 주위를 잘 둘러보면 상대편에서 뭘 만드나 하고 기웃거리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산업 스파이나, 다른 조에 가서 자신 조의 재료와 물물교환을 제안하는 행상인들 등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인문 체험'
단지 걷고 밥을 먹고, 또 다시 걷는 것만이 도보여행의 일정은 아닙니다. 코스 중간중간 근처의 유적지나 관광 가치가 있는 곳을 방문하는 것 역시 도보여행의 묘미입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사찰을 방문하거나, 인근의 유적지를 돌아보거나, 그 밖에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이때에는 종종 조별로 자유 탐방 시간이 주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담당 선생님과 함께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람을 합니다. 단풍이 한창 들 시기의 멋진 풍광을 즐길 수도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