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이야기
3학년이 되어 마지막으로 떠나게 될 인문체험학습은 농촌봉사활동입니다. 사전에 봉사 지역을 정하고 답사한 뒤, 해당 지역의 농촌 단지/농가/농업 체험 가능 장소를 방문하여 3박 4일 간 함께 작업을 도와드리는 체험활동입니다. 농촌 봉사라니, 밭에서 잡초를 뽑고, 간식도 좀 얻어먹고, 수확하는 것도 도와드리며 쉬엄쉬엄 하다 보면 3박 4일이 금방 지나 있으려나요?
이런 생각이 든다면 잠시 눈을 감고 학교 소유의 밭과 가을의 야외 청소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의 학교는 흙을 다루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을 다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농촌봉사활동은 '정말 이것이 봉사의 수준이 맞나'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진행되곤 합니다. 우선 챙이 넓은 밀짚모자와 고무장화, 두툼한 목장갑과 호미, 그리고 이른바 '몸빼 바지'로 완전무장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장비를 모두 갖추면 흙을 파헤쳐 잡초를 캐고, 농작물을 수확하고, 수확한 농작물을 상처가 나지 않게 상자에 옮겨 담고, 다시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들을 나르고, 앞의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합니다. 포도 농장, 고구마 밭, 땅콩 밭 등 해치워야 할 농작물의 종류도 정말 다양하니, 농촌봉사라는 말보다 농촌 노동집약적 캠프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는 학생들 사이의 농담도 어쩐지 단박에 이해가 가는군요.
농촌의 경제와 창업
농촌봉사활동에서는 농번기 수확을 돕는 작업과 더불어 각 학년마다 주제를 정해 탐구활동을 병행하기도 합니다. 이번 해의 주제는 '농촌과 창업' 이기 때문에, 첫째 날의 일정은 주로 농산물과 연관된 지역 사업의 거점 시설을 방문하는 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해당 지역의 로컬 푸드 관련 시설을 방문 견학하고 로컬 푸드에 관한 강의도 들으며 농작물을 통한 사업의 현황과 농촌의 경제에 관해 배우는 것이죠. 실제 로컬 푸드를 시식해 보는 것 역시 프로그램의 일부인데, 학생들은 좋은 명분을 가지고 마음껏 로컬 푸드로 뷔페식 식사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해당 지역에서 새롭게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는 신품종 농산물을 알아보고 농가에 직접 방문하여 이런저런 소개를 듣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강의를 듣고 시설 견학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조별 활동을 진행할 차례입니다. 미리 편성된 조끼리 모여 '농촌에서의 창업 가능성과 아이템'을 고안하고 이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체육대회나 산악등반 때 모두를 웃기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 바빴던 아이들도, 이날만큼은 차분한 태도로 나름의 통찰력을 발휘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곤 하죠. 그렇게 농촌에서 실리콘밸리를 꿈꾸다 보면 정신없는 하루가 금세 지나가고 다음날이 밝아 옵니다. 농촌봉사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호미를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수확의 기쁨
이튿날에는,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수확해야 할 농작물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이날을 위해 미리 작업복(몸빼바지)을 맞춘 학생들도 있습니다. 다들 밀짚모자를 쓰고, 통풍이 잘 되는 옷을 입고, 고무장화를 신고, 목장갑을 끼고 호미를 든 채 수확해야 할 농작물이 한가득 기다리고 있는 넓디넓은 밭으로 향합니다. 작업에 앞서 선생님과 농부 분들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시범을 보여 주시므로, 이를 유심히 살펴본 뒤 그대로 작업을 따라하면 됩니다. 시범 작업을 볼 때는 예상했던 것보다 손쉬운 듯한 과정에 '아 뭐야, 괜히 겁먹었네' 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도 있지만, 막상 흙과 본격적으로 씨름을 시작하다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열심히 손과 발을 놀리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지곤 하죠. 중구난방으로 판을 벌여 놓다가는 얼마 못 가 두 배로 힘들어진다는 자명하고도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학생들이 나름의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흙을 미리 파헤쳐 놓는 담당, 고구마를 끌어올려 상처가 나지 않게 캐는 담당, 캐낸 고구마를 옮기는 담당, 상자 포장 담당, 운송 담당 등으로 암묵적인 작업 분배 시스템이 형성되는 것이죠. 머리 위에 뜬 해의 위치가 바뀌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익숙한 가요를 노동요로 바꾸어 부르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도 합니다. 옷에 흙이 묻을세라 조심하던 아이들도 이 즈음이면 온몸에 흙과 모래를 뒤집어쓰게 되곤 합니다. 해가 저만치로 저물어 가면, 모두가 힘들었던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저녁 노을을 뒤로 한 채 논길을 가로질러 '퇴근'을 합니다. 일을 모두 마친 뒤 찾아오는 저녁식사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후련한 시간이나 다름없겠죠?
내가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요
이따금씩 학생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산악등반 때처럼 냄비에 물을 넣고 밥을 짓는 종류의 요리가 아니라, 식혜나 두부 등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이죠. 물론 학생들이 기여하는 부분은 음식 조리 과정 전체 중 일부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재료를 몇 번 나르고 주걱으로 몇 번 휘저어 보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손이 닿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음식에 조금 더 정이 들곤 합니다. 만들어진 음식은 오롯이 학생들의 입으로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정말 '내가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드는 셈입니다. 실제로 농촌봉사활동 후 학생들 몇몇을 붙잡고 소감을 물어보면, '식혜가 맛있었다.' '누구가 만든 두부가 예술이었다' 등 봉사와는 관련없는 음식 이야기가 속출하기도 합니다.
캠프파이어와 뜨끈한 온돌방에서 보내는 밤
일과가 끝나면 숙소로 향합니다. 순서를 정해 하루 종일 땀을 흘려 찝찝했던 몸을 개운하게 씻고, 따끈한 온돌방에 너나할 것 없이 드러누워 간식을 먹고 수다를 떨기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숙소에 넓은 마당과 평상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평상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평상에 누워 있다 보면 쌀쌀한 밤 공기를 가로지르며 산책을 하는 친구들 몇몇이 눈에 띄기도 하죠.
낮 동안 고되게 일했던 만큼 더욱 아늑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숙소에서의 시간입니다.
운이 좋다면, 마지막 날 밤 모두가 모여 캠프파이어를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다함께 넓은 들이나 마당 등의 공간으로 향해 가운데에 커다란 모닥불을 지펴 놓고 둥글게 앉아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불똥을 구경합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3학년끼리 함께하는 시간인 만큼, 간혹 누군가 불을 한참 바라보다 친구들에게 감성에 젖은 멘트를 날리기도 합니다. 이후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으면 누군가의 주도로 즉석 노래 자랑이 펼쳐지곤 합니다. 먼저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선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지목당해 슬금슬금 나온 학생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한 곡씩 부르다 보면 캠프파이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농촌 창업 발표와 마무리
마지막 일정은, 그동안 조원들과 함께 구상했던 농촌 창업 아이템을 모두의 앞에서 발표하는 것입니다. 각 조가 미리 준비해 둔 발표 자료를 가지고 자신의 조에서 기획한 사업안을 설명하면 선생님들과 친구들 몇몇의 짤막한 의견과 피드백이 그 뒤를 잇습니다. 개중에는 참신함으로 호평을 듣는 조도 있고, 생각지 못했던 허점을 지적당하는 조도 있곤 하죠. 모두가 발표를 끝마치면 마침내 3박 4일 간의 농촌봉사활동 일정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조금은 힘들지만 개운한 몸을 이끌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주말을 즐긴 뒤 학교로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집의 식탁에 고구마가 올라온다면 바로 며칠 전에 흙투성이가 되어 가며 열심히 캐냈던 고구마 생각이 나겠죠? 농촌봉사활동이 끝난 후 한동안은 직접 수확했던 농작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인문체험학습이 모두 끝나면, 2학기도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휴식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면 이전보다 공기가 한결 더 쌀쌀해진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놓인 11월의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