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이야기
여러 번 언급했듯, 우리의 학교는 스스로 삶을 꾸려 나가는 힘을 기르자는 취지에 맞게 일부 식자재를 직접 생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리고 직접 만들기에 김치만큼 좋은 식자재가 없죠. 매년 11월이면, 온 학교가 다음 일 년 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기 위한 김장 준비에 몰두하게 됩니다.
첫째 날, 배추와 무를 씻자
보통 11월의 한 주를 '김장 주간'으로 정하고, 그 주 안에 김장을 진행하게 됩니다. 김장 주간에는 학생들과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부모님들이 학교를 방문하여 손을 빌려 주시기 때문에 학교에 많은 차와 사람들이 드나들며 평소보다 더 북적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장 주간 중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작업해야 하는 시간은 약 3일 정도로, 첫째 날에는 주로 배추와 무를 나르고 각종 재료를 씻습니다. 이날 주로 동원되는 것은 1학년 학생들입니다. 우리도 함께 김장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가 볼까요?
학교 건물과 식당 사이를 잇는 큰 야외 길목으로 들어서면 못 보던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을 것입니다. 천막 아래에는 조리대가 일렬로 길게 놓여 있습니다. 이 낯선 천막들과 조리대가 김장 작업을 위한 거점 역할을 하게 될 곳입니다. 1학년 학생들의 일은 힘을 합쳐 배추와 무를 비롯한 각종 식재료를 나르고, 차가운 물을 이용해 채소들을 씻고 다듬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고무장갑과 비닐 캡을 챙겨 조리대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하면 됩니다. 11월의 추운 날씨에 야외에 오래 머물며 차가운 물에 내내 손을 담그고 있는 것은 꽤나 고된 일이기에 중간중간 이곳저곳에서 손이 빨갛게 얼었다고 탄식하는 목소리나, 손에 감각을 잃었다며 외치는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심인 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김장 작업을 돕는 학부모님들이 커피와 차를 드실 수 있도록 천막 옆에 마련된 온수기로 달려가 따뜻한 물에 손을 녹이는 학생들도 속출합니다. 평소 힘 좀 쓴다는 소리를 듣는 학생들은 배추와 무를 나를 때 가장 선두에 서서 작업량에 크게 일조하곤 합니다. 찰랑거리는 물 소리, 바쁘게 오가는 발걸음 소리와 열심히 수다를 떠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길목을 가득 채우는 김장 첫 날입니다.
둘째 날, 배추를 절이고 속을 만들자
이튿날에는 2학년 학생들이 많이 동원됩니다. 이때는 배추를 썰어서 소금에 절이는 배추 담당 팀과, 김치 속에 들어갈 재료를 손질하는 김치 속 팀으로 작업이 분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이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가 자리를 잡은 조리대에 배추가 오느냐 속 재료가 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간혹 자신의 적성과 전혀 맞지 않는 팀에 배치될 수도 있습니다. '난 여기는 못해먹겠다!' 싶은 아이들이 합의 하에 자리를 바꾸고 새로운 적성을 찾는 이직 시장이 활발해지기도 합니다. 배추를 절이는 팀은 각자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에 위생캡을 쓴 뒤, 열심히 배추를 자르고 커다란 대야 안에 넣어 소금에 배추를 절여야 합니다. 간혹 요리에 감각이 없는 친구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소금을 마구 뿌리면, 옆에서 다년간의 김장 경험을 가진 학부모님들이나 식당 조리사님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노하우를 일러 주시기도 합니다. 김치 속 재료를 준비하는 팀도 마찬가지로 고무장갑과 위생캡으로 완전무장한 뒤, 열심히 재료를 썰고 다듬습니다.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쌀쌀한 날씨에 오래 바깥에 있다 보면 코에 감각이 없다고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이때 농땡이를 피웠다가는 바람을 오래 맞아 성정이 사나워진 주위 친구들에게 뭇매를 맞을 수 있으니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작업을 마무리하고 다함께 뜨끈한 기숙사 바닥에 드러눕는 것만이 상책이겠죠?
셋째 날, 열심히 버무리자
셋째 날은 자연히 3학년들이 많이 참여하는 날이 됩니다. 이날은 정말 말 그대로 '진짜 김장'을 해야 하는 날입니다. 미리 준비된 재료들을 갖은 양념과 함께 버무려 속을 만들고, 절여진 배추에 꼼꼼하게 속을 채우고 버무려 주면 됩니다. 필수 장비인 고무장갑과 비닐 캡을 챙겨 자리를 잡고, 김장을 여러 해 경험해 본 능숙한 손길로 빨간 양념을 배추에 골고루 묻혀 줍니다. 양념이 곧 김치 맛을 결정하는 생명인 만큼 당연히 양념 간이 적절한지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한데, 으레 그렇듯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자주 맛을 보는 학생들의 모습을 왕왕 볼 수 있습니다. 빠트린 부분이 없도록 신경쓰며 열심히 김치를 담그다 보면 주변을 지나던 학생들이 빨간 김치의 색과 냄새에 홀린 듯 슬쩍 다가오기도 합니다.
김치를 담그는 작업이 완료되면, 모두가 기다려 오던 김장의 하이라이트인 점심식사가 시작됩니다. 점심시간이 되기 한참 전부터 식당에서 솔솔 풍겨나오는 냄새는 전교생을 홀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김장 마지막 날 점심 메뉴는 무조건 수육입니다. 수육에 갓 만든 김장김치를 곁들여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 비로소 김장을 마무리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월 말로 접어들면, 날이 부쩍 추워지면서 평소라면 방과 후 자유시간에 학교 본관에 머무르며 놀거나 바깥에 나가 운동을 했을 법한 학생들도 모두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후다닥 기숙사로 들어오곤 합니다. 여러 채광창을 가지고 있어 빛이 잘 들고 적당히 아늑한 기숙사는 편안한 모습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 즈음 기숙사의 생태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로비는 만남의 광장
기숙사 입구로 들어서면, 곧장 넓은 공용 공간인 로비(중앙 홀)로 접어들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이 넓게 펼쳐진 로비는 무언가 놀이판을 벌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나 다름없죠. 이곳의 학생들은 아무런 도구 없이도 노는 데 도가 텄기 때문에, 그 흔한 보드게임이나 카드 하나 없이 로비에 둥글게 모여 앉아 마피아 게임을 비롯한 각종 놀이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럿이 놀기 위해 로비를 찾는 학생들 말고도, 가끔 자신의 방 안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고요함을 즐기기 위해 로비로 나와 책을 읽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로비를 거닐며 친구와 수다를 떠는 학생들도 많죠. 간혹 운동을 하겠다며 로비를 정신없이 걸어다니는 학생들도 발견되곤 합니다.
주상복합단지?
기숙사는 로비를 가운데에 두고 여러 개의 방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구조입니다. 당연하게도 각자에게 배정된 방이 있지만, 점호 시간 전까지는 사실 내 방 네 방의 구분이 잘 없는 편입니다. 이쪽 방 친구가 놀자고 하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저쪽 방에서 뭔가 재미있는 걸 한다고 하면 또 그쪽 방으로 몰려가고 하는 식이죠.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대에 불이 켜진 따뜻한 기숙사로 들어가면, 각 방마다 특징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방의 형태는 서너 명 정도가 모여 둥글게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수다방입니다. 학생들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 앞을 지나다가도 안에 친한 친구가 있는 게 보이면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수다에 참여하곤 합니다. 또 종종 보이는 방은 낮잠 방으로, 은은한 스탠드 불빛만이 흘러나오는 고요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열에 아홉은 잠시 눈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곤 합니다. 누군가 자고 있고, 그 옆 구석에서 또 다른 학생들이 스탠드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구성의 방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서로에게 불편한 소리를 하지 않지만, 간혹 누군가 자는데 큰 목소리로 떠들면 날카롭게 째려보는 시선이 되돌아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는 데 여념이 없는 방도 있습니다. 춤출 마음은 없지만 그저 저 애들이 정신을 놓고 놀고 있는 모양새가 재미있어서 슬며시 구경하는 관람객도 가끔 생깁니다.
한편 조별 과제를 하느라 분주한 방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그리고, 오리고, 꾸미는 등 시각 자료를 제작해야 하는 발표 과제가 많은 편이다 보니, 같은 조인 학생들이 한 방에 모여 사방에 색종이와 사인펜, 가위 등을 흩어 놓고 작업에 몰두하는 광경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목격하기 힘든 방이지만 방의 구성원들이 각자 공부를 하고 있는 곳도 가끔은 있습니다.
점호 시간에는 무엇을 하나요?
밤 아홉 시가 되면 모두 점호를 하기 위해 로비로 모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의 점호는 '알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방의 방장들은 알짬 시간에 앞서 자기 방의 구성원들이 모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사감 선생님이 출석을 체크할 때 대표로 '다 왔어요!' 라고 말해야 합니다. 3학년 학생들이 방장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니 가끔 3학년끼리 장난기가 발동해 출석 체크 문구를 한 글자씩 끊어 말하기도 합니다.
알짬은 사감 선생님과 기숙사의 학생 대표인 사생장, 부사생장이 함께 진행합니다. 간단한 공지사항이나 내일의 일정에 관한 안내 이후, 공지사항이 있는 사람들이 공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됩니다. 이전에 '두레'를 통해 다음날의 숙제를 알려 주는 역할을 맡았던 학생들이 숙제를 공지하기도 하고, 평소 느꼈던 개선점을 모두의 앞에서 말하기도 하는 시간입니다. 공지 시간에 이어 칭찬 시간까지 완료하고 나면 모두가 기다리는 간식 시간이 찾아옵니다. 오리엔테이션 때 간식에 목숨 거는 선배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신입생들은 이제 누구보다 열심히 간식 상자 개봉을 기다리는 재학생이 되었습니다. 같은 학년끼리 로비에 둥글게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간식을 먹는 시간이 기숙사가 가장 생기가 넘치고 활발해지는 순간입니다.
기숙사가 어느덧 집보다 편안해지고 그 안에서 보내는 저녁 일과가 익숙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도 어느덧 일 년을 채워 가고 있습니다. 11월에서 12월로 달력이 넘어가면, 학교에서 보내는 일 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됩니다. 이곳에서 맞이하게 될 올해의 겨울날은 채 한 달이 남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