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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음 May 28. 2024

Ep.9 실리콘밸리 회사의 세일즈 전문가가 되다

다양한 문화, 저마다의 배경을 가진 동료들의 이야기


"다음 주 중 인터뷰가 가능하신가요?"

기대하지 않았던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난 후, 많은 전업맘들이 겪는다는 소위 '빈 둥지증후군'을 겪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미국에 올 때 아이에게 그동안 못했던 '엄마' 역할에 최선을 다해보자고 결심했던 터라 지난 몇 년간 발런티어와 아이 롸이드에 집중하며 경단녀로 지낸 지 어느새 7년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학교도 다니고 영어 실력도 키워놓았다고 자부했지만 미국, 그것도 실리콘밸리에서 엔지니어나 기술직도 아니고 미국 학위도 없는 40대 아줌마에게 이 사회는 과연 취업 기회를 줄 수 있을까? 그것도 마케팅 분야, 즉 비엔지니어 직군에게 말이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리면서도 한 곳이라도 연락이 오면 조건 상관없이 무조건 'GO!' 하겠다고 다짐한다.




기다리던 첫 출근


중국에 공장을 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전문회사에서 세일즈 팀을 충원한다는 공고를 보고 용기를 냈다. 20여 년간 이 분야의 전문 기업으로 미국은 물론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전역에서 탄탄하게 성장해 온 알짜 기업이었다. 한국에서 글로벌 IT 회사 마케팅 경력이 어쩌면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정성껏 자기소개서를 준비했다.


애플리케이션을 보낸 후 바로 다음날,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울린다. 인터뷰 콜을 받은 거다.


약속된 인터뷰날, 최선을 다해 나의 강점과 그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과 소신에 대해 피력했다.


처음부터 합격하리란 큰 기대 없이 지원한 거라 떨지 않고 당당하게 인터뷰에 임한 결과일까? 나도 마침내 실리콘밸리 회사의 세일즈우먼이 되었다.


비록 경력은 절반이상 깎였고, 월급도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실리콘밸리의 직장인으로서 제공받게 되는 각종 혜택 및 보험, 퇴직 연금 등이 모두 내 이름으로 생겨났다. 마치 내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


'이제부터 열심히 일해 머지않아 내 경력을 모두 인정받고 제자리를 찾아가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고, '나는 원래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여기서도 분명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세뇌 시켰다.


회사에서 보내준 계약서에 당당히 사인하고 정해진 날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첫 출근길에 나선다.


오늘따라 쿠퍼티노의 날씨가 유독 더 청명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항상 들어오든 다양한 새들의 울음소리도 나를 위해 반갑게 지저귀어 주는 듯했다.




다양한 사람들, 서로 다른 문화


이곳에서 나는 다양한 코워커들을 만났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일도 곧 손에 익어 프로모션 기회도 얻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이듬해 모든 업무가 재택근무로 전환돼 아쉽게도 대면 근무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5년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통해 알게 된 다양한 문화와 특성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나의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운이 좋게도 우리 팀에는 인도, 중국, 이란, 폴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이 함께했다. 함께했던 동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록을 남겨본다.



첫 번째 코워커. 라따


실리콘밸리는 엔지니어 비중이 높은 관계로 인도사람의 비중이 그 어느 지역보다 높은 편이다. 내가 살고 있는 타운하우스(단독주택들이 한쪽 벽을 공유하는 형태로 단지를 이루고 있는 주거 형태)에도 양 옆과 뒤 앞집 모두 인도인 가족들이었다. 저녁시간이면 된장찌개가 아닌 인도카레 냄새가 진동을 하고 집 밖에선 인도식 영어 발음이 항상 들려 여기가 뉴델리인지 산호세인지 헷갈릴 정도다.


나와 가장 합이 잘 맞았던 라따는 인도에서 중간 이상의 계층민이다. 아버지는 수의사였고 22살에 정략결혼(arranged marriage)을 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인도 남쪽 지역 출신으로 여러 IT 기업들이 있는 지역이라고 했다. 남편은 애플 엔지니어로 대부분의 인도 가정이 그렇든 아들 딸 두 아이와 함께 4인가족을 이루고 산다.


매년 10-11월경에는 힌두교도들의 최대 명절 디왈리가 열린다. 인도 전통복을 입고 수십 가구가 한데 모여 전통 축제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디왈리는 라따에게도 매우 중요한 큰 명절이다. 그녀는 일찌감치 디왈리에 입을 드레스를 준비하고 올해의 행사를 빛나게 해 줄 전통 의상과 소품을 준비한다.


이 명절에는 가족 단위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최소 5-6 가족이 한데 모여 포트락 파티를 한다. 올해는 라따의 집이 호스트라고 했다. 결혼 30년 차인 그녀는 인도 전통 파티를 준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실리콘밸리 인도인 대부분은 남자는 엔지니어, 여자는 육아에 집중한다. 간혹 여자들이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기도 하고 라따처럼 사무직에 종사하기도 한다. 파티를 하면 여자와 아이들이 그룹 1, 남자들이 그룹 2로 각각 다른 방에 모여 저마다 관심사를 공유한다. 마치 우리나라 70년대를 보는 듯하다. 결혼은 집안과 신분이 높을수록 중매결혼을 선호하고, 연애결혼은 이제 막 허용하는 분위기다.


여전히 카스트라는 계급사회를 살고 있는 인도인들이 점점 실리콘밸리를 지배하고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등 여러 빅테크 CEO가 인도인들이며, 엔지니어=인도인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맨파워는 지배적이다.




두 번째 코워커. 미시즈 베이커


중국과 대만에 공장을 갖고 있는 우리 회사는 중국인과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때문에 우리 회사 내 중국인 비중이 꽤 높은 편이다. 가끔은 여기가 베이징이나 상해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말이 많이 들린다. 특히 음력 설날인 춘절(Chinese New Year) 연휴는 2주간으로 중국 내 모든 생산라인이 올스탑에 들어간다. 고객들의 주문을 받을 때도 이 기간을 감안해 2주 이상을 더 추가해 납기 일정을 잡아야 한다.   


미시즈 베이커는 상해에서 명문 대학을 나왔다. 부모님도 교수로 재직 중이시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 재학 시절, 중국에 교환 학생으로 온 3살 연하 미국인 베이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해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사랑이 우선인지 임신이 먼저인지 아니면 미국인이 되고 싶었던 건지는 검증된 바 없다.


지금은 아들과 딸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미국으로 넘어온 온 후 생활력이 없는 베이커 씨와는 이혼했으나 그녀의 라스트네임은 여전히 미씨즈 베이커다. 아이들의 성을 지켜주기 위해서인지 미국 내에서 미국인 성을 쓰면 얻게 되는 이익이 더 많아서인지 역시 검증된 건 없다. 그녀의 원래 성이 “왕”씨인걸 알게 된 건 그녀가 몇몇 친구들과 소통하는 소셜미디어를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강인한 중국 여인답게 아이를 바르게 잘 키워냈고, 일에도 열심인 멋진 커리어 우먼이다. 중국인의 악센트가 강했고, 중국 공장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할 수 있었던 핵심 세일즈 팀 인력이다.  


어느 정도 거리감을 갖고 대하던 그녀와 우연히 저녁을 함께 하며 속 내를 터놓은 적이 있다. 그녀가 K드라마의 열성 팬이고 우리 라디오 프로그램 스티리밍을 다운로드하여 들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진심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열심히 하는 그녀, 중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간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세 번째 코워커. 로버트


아버지는 독일, 어머니는 폴란드 출신인 엔지니어 로버트. 우리 회사 제품의 기술적 자문을 맡고 있는 그의 방은 모형 기차로 가득 차 있다. 회사 업무와 별개로 전 세계 각종 모형 기차들을 수집하는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좀처럼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진 않지만, 자신이 주문한 모형 기차가 원하던 물건이 아니면 그 즉시 아마존 고객센터에 전화해 고래고래 호통을 치는 사람이다. 매일 정체 모를 큰 가방을 화장실 갈 때조차 들고 다녀 사람들이 그 가방의 정체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곤 했던 천재 엔지니어.


로버트는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 기간에도 회사에 매일 출근해 연구실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다. 또 점심시간이면 회사 구석에 위치해 있는 피아노를 홀로 연주하며 그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나와는 직접적인 컨택이 많지 않았으나 어느 날 내가 기술 이슈로 커스토머와 문제가 생긴 일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 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자기 일인 양 열과 성을 다해 고객에게 기술적 이슈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도 합리적 해결점을 도출하며 고객을 설득시켰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갖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 그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한방에 해소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네 번째 코워커. 알리 & 아리아


알리는 이란인이다. 여름철에도 긴팔에 가급적 맨살이 드러나지 않는 슈트 차림을 선호한다. 특별히 물어본 적은 없으나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인 듯했다.


이란과 미국은 이란 제국의 우호관계에서 호메이니 이슬람 정권이 생긴 후부터 적대적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이란인들이 미국에 입국하기도, 고국을 방문하기도, 가족들을 초대하기도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다.


미국으로 이민 온 대부분의 이란인은 팔라비 정권 때 잘 나가던 이란의 중상류층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슬람 문화를 이어가며 엘리트 출신이 많고, 외모도 금발에 흰 피부를 지녀 유러피안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알리도 이름을 모르는 상태로 이란인이라고 밝히지 않았으면 유럽 어딘가에서 온 사람으로 알았을지 모른다. 알리는 결혼 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초반으로 유머러스하고 활달해 고객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다.


또 다른 코워커 아리아도 이란인이다. 그녀는 금발에 흰 피부로 패션 감각이 좋고 파티를 좋아한다. 아리아는 특별한 날엔 가슴이 깊게 파인 우아한 드레스를 챙겨 입고, 파티가 있는 날이면 무슬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과감한 옷차림을 소화한다.


아리아도 자신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신앙심도 깊다. 회사 근처에 페르시안 전문 음식점이 있어 동료들과 함께 종종 가곤 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건강한 식단이 이곳 음식의 특징이다.  


페르시안 요리는 천연재료를 사용해 맛과 건강을 모두 챙겼으며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




다민족의 집성체,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 아니 미국 이민자라면 통용되는 이야기가 있다.


아시안을 만나면 미국인들은 어김없이 "어디서 왔니?(Where are you from?)"라고 묻는다. "산호세", "뉴욕", "시카고" 이런 답변을 들으면 꼭 "응. 그러니까 원래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Where are you originally from?)"하고 되묻는다.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지만 이 같은 질문은 백인이 아닌 아시안들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 살고 있더라도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에게는 그들의 원래 조상들의 국적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즉 '코리안아메리칸', '차이니즈아메리칸', '인디언아메리칸' 등의 답변을 기대하며 물었던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이방인'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창래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 Native Speaker>에서는 이민 1.5세로 성장해 미국 주류 사회에서 성공했으나 여전히 풀지 못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다루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내 유일하게 아시안들의 파워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백인들이 이곳에선 기를 펴기 힘들다고도 한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이나 자라온 배경, 어떤 피부색을 가졌느냐에 상관없이 실력과 능력이 있다면 무한한 기회가 주어지는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세일즈 우먼으로 지낼 수 있었던 5년간의 경험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국적과 핏줄, 언어를 가진 코워커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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