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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음 Mar 20. 2024

Ep. 5 네이티브 스피커

실리콘밸리 정착 관문(3) 영어를 잡아라

Paper or plastic?

집 근처 슈퍼마켓인 Safeway에 들려 과자 몇 가지와 음료수를 구매하고 계산대에 섰더니 캐시어가 대뜸 묻는다. 순간 무슨 뜻인지 몰라 "Excuse me?" 하고 되물었다. 그녀는 살짝 짜증 나는 투로 다시금 "paper or plastic?"하고 묻는다. '아하! 종이백과 비닐백 중 어디 담아주면 좋냐는 뜻이었구나?'

(지금은 캘리포니아의 환경보호를 위해 비닐백 사용을 금지하면서 더 이상 이런 질문을 받지는 않는다.)


처음 실리콘밸리에 도착했을 때 현지인들이 흔히 쓰는 흔한 생활영어를 이해하지 못해 종종 당황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실리콘밸리에 살다 보면 현지에서만 배울 수 있는 생활영어와 다양한 악센트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영어


 "Learn a new language and get a new soul."- 체코 속담

실리콘밸리는 미국 내 그 어느 지역보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곳이다. 지리적 위치가 캘리포니아 중심에 있고 테크 회사들로 인해 외국인 유입이 계속 늘다 보니 백인은 물론 아시안, 히스패닉, 유러피안, 아프리칸, 중동 등 그야말로 전 세계 모든 인종들의 집결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곳 여기저기서 다양한 악센트가 들리며 변형된 영어, 즉 broken English가 많아 가끔은 어떤 발음이 진짜 native English이며 저 표현이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도인'들을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민속 의상을 즐겨 입으며, 디왈리(Diwali) 등 그들의 고유 명절들을 떠들썩하게 보낸다. 또한 카레향이 동네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자신의 정통 요리를 즐겨 먹는다. 때로는 이곳이 미국이 맞는지 인도 방갈로르나 뭄바이에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인도인들의 영어 악센트는 미국 정통 영어 발음과는 차이가 있다. 영국령이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자국 내 교육 및 행정어로 '영어'를 사용하다 보니 실리콘밸리에서 만나는 인도인들 대부분이 영어에 능통하다. 하지만 그들의 독특한 악센트는 인도말을 하는지 영어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로 강하다. 그렇다고 인도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영어 악센트로 인해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 있게 먼저 말을 건네고, 어디서나 질문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나도 처음에는 인도인들의 악센트를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도식 영어에 익숙해졌져 갔다. 또한 그들과 친구가 되면서 무엇보다 자신 있는 태도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바로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언어는 무엇보다 자신감이 중요하다.

실리콘밸리는 여러 민족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싱글리시(싱가포르 영어), 칭글리시(중국 영어), 징글리시(일본 영어), 콩글리시(한국 영어) 등 각종 아시안들의 악센트를 비롯, 유러피안 및 중동 지역인들의 독특한 억양까지 형형색색 다양한 영어가 자유롭게 통용되는 곳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던가? '영어'에 대한 경쟁력은 미국에 사는 이상 핵심 치트키가 되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보다 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그리고 대학교 4년 등 최소 12-16년 이상(요즘엔 영어 유치원도 있지만)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배워왔다.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대한민국의 영어 교육 열기에 대해 설명하면 다들 깜짝 놀란다. 즉,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코리안이라면 누구나 기초 영문법과 기본 단어가 우리 잠재의식 속에 스며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에 왔으니 최소한 '영어'는 정복하고 가야지"


어덜트스쿨에서 배우는 Free ESL


처음 실리콘밸리에 도착해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어 교육기관은 어덜트스쿨(Adult School)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레벨의 무료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코스와 저렴한 비용의 영어 회화 클래스가 있다.


무료 클래스에 참여하려면 해당 교육청에 소속된 어덜트스쿨 오피스를 찾아가는 것이 첫 스텝이다. 지역별 상황이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이곳에서 ESL을 수강하기 위한 '플레이스먼트 테스트'를 신청하고, 해당 날짜에 평가를 받아 레벨에 맞는 클래스를 수강할 수 있다.


어덜트스쿨에서는 미국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기초 지식과 그곳에서 필요한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익힐 수 있다. 예를 들어, 병원 예약을 어떻게 하는지,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약의 종류는 무엇인지, 기본적인 법률 상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 교통 법규 위반 시 대책은 무엇인지, 학교 생활에 필요한 기본 지식, 여행 가기 좋은 곳 등등.


우리가 실생활에서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지식과 그에 따른 상황별 영어를 이곳에서 모두 배운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사귈 수도 있어 처음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우리 동네 어덜트 스쿨에는 영어 레벨도 다양했는데 '기초반 beginner class'부터 '고급반 high advanced class'까지 총 6 단계의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비즈니스 영어, 회화 등 다양한 선택 과목도 있어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리콘밸리에는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어덜트스쿨이 곳곳에 있다


지역주민에게 오픈된 커뮤니티컬리지


어덜트스쿨로 기본기를 다진 후 다음 단계로 동네에서 운영되는 커뮤니티 컬리지에 도전해 본다. 실리콘밸리에는 UC(University of California)와 학점을 공유하는 유명한 커뮤니티 컬리지가 몇 곳 있는데, 이곳에서 영어는 물론, 다양한 수업을 자유롭게 수강하며 영어 실력을 함께 키워갈 수 있다.


단, 커뮤니티 컬리지는 1년 이상 거주한 지역 주민에게만 할인된 등록금을 적용해 주기 때문에 1년이 지난 후부터 등록해야 비용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나는 집 주변 커뮤니티컬리지 등록을 서둘렀다. 입학만 하면 영어뿐 아니라 다양한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흥분됐다.


커뮤니티 컬리지의 어드미션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고등학교 졸업 또는 동등학력 소지자'로 '캘리포니아 거주민'임을 입증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입학이 허가되고, 클래스 수강을 위해서는 영어, 수학, 과학 등 '입학시험'을 치러야 한다.


Welcome! Thanks for applying to **College. Your admission for fall quarter is confirmed.

거주 1년이 지나면 지역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영어 및 다양한 과목을 할인된 등록금으로 수강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내내 나는 이곳에서 영어뿐 아니라 퍼블릭스피치, 역사, 웹디자인, 아트클래스 등 듣고 싶었던 다양한 과목들을 수강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 컬리지는 대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의 교과 외 과목 수강에서부터 대학생 및 편입준비생의 대학 수업, 그리고 나 같은 성인의 평생 교육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공한다.


다만, 어덜트스쿨처럼 부담 없이 수강하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이곳에서는 대학에 준하는 매우 타이트한 커리큘럼과 까다로운 평가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학점관리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컬리지에 다니는 동안 나의 영어 실력 향상뿐 아니라 미국 대학의 캠퍼스 문화도 체험하고, 다양한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A different language is a different vision of life"
-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30년 이상을 살다 이주한 경우 모국어 보다 영어가 더 편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TV를 보거나 운전하면서 틀어둔 지역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멘트가 조금씩 익숙하게 들려온다. 또 지역 발런티어 활동에 참여해 현지인들과 웃고, 떠들고, 함께 봉사하며 낯설었던 언어와 문화가 스멀스멀 내게도 스며들고 있음을 느낀다.


이렇게 해외살이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영어 실력만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나 목적도 함께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여행은 공간과 시간을 바꾸는 작업이다'라고 했다. 즉, 그동안 살아온 방식과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타국으로의 이주가 아닐까.

우리 가족이 너무나도 자주 찾았던 Half Moon Bay. 태평양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다.



** 다음 Episode 6에서는 <실리콘밸리에서 미국의 명절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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