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다
"나 피아노 연습을 더 해야겠어.
아침마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반주를 해보고 싶어."
쥬쥬가 갑자기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보인다. 실리콘밸리에 도착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쥬쥬는 집에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를 열심히 쳤다. 마치 낯선 환경에 대한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피아노로 푸는 것 같았다.
미국 오는 이삿짐을 쌀 때 피아노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엄마는 일찌감치 피아노를 구입해 언니와 나, 두 딸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그 영향인지 나도 쥬쥬가 4살 때 피아노, 그것도 풍부한 음량을 보유한 업라이트 피아노를 덜컥 사주고 말았다.
쥬쥬는 피아노에 처음부터 흥미가 있지는 았았다. 하지만 집에 피아노가 있다 보니 나와 우리 언니(이모)로부터 조금씩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초등학교부터는 제대로 레슨을 받아 이미 체르니 100번은 마친 상태였다. 또 음악을 전공한 이모에게 플루트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제정신이야? 미국에 피아노까지 가져가겠다고?" 친정 엄마는 해외이삿짐 견적을 내는 내내 옆에서 잔소리를 멈추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는 쥬쥬 손때가 묻어있는 저 거대한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피아노와 초보용 플루트까지 두 종류의 악기가 우리 가족과 함께 실리콘밸리에 도착하게 된다.
뮤직 키즈의 길
쥬쥬는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 이미 새로운 학교 시스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쥬쥬가 나서서 반주자를 자원하겠다고 하는 모습은 내심 의외였다.
"정말? 선생님이 제안한 거야?"
"아니, 내가 하고 싶어. 반 아이들 앞에서 반주하는 게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쥬쥬는 학교에서 받아온 'Oh Beautiful America' 반주 악보를 보며 열심히 연습을 했다. 며칠 후 쥬쥬는 결국 아침에 다 같이 하는 그 노래의 반주를 맡게 되었다고 자랑하며 의기양양해했다.
그 후부터 쥬쥬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음악 발표회에 참여하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장선생님이 주관하는 어셈블리(전교생 모임) 시간에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장기자랑하는 시간이 있었다. 쥬쥬는 피아노나 플루트를 들고나가 친구들과 함께 간단한 공연을 자원할 정도로 음악 연주를 즐기는 아이로 커나갔다.
"지역 청소년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지원해 보세요."
매년 초가 되면 실리콘밸리 지역의 주요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신입 단원 모집이 한창이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청소년이면 누구나 오디션에 응시할 수 있다.
4학년이 끝나갈 무렵 쥬쥬도 플루트로 지역 오케스트라에 지원해 보고 싶어 했다. 기초만 배우고 온 플루트 실력으로 오디션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오케스트라에 도전해 더 많은 공연을 하고 싶다는 아이의 야심 찬 의지를 지지해 주기로 했다.
오디션까지 2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한국에 있을 때 익혔던 곡 하나를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쥬쥬는 그 어느 때보다 음악에 열정을 보였다.
오디션 담당자는 따뜻한 인상의 중년 플루티스트였다. 그녀는 어린 쥬쥬가 오디션을 앞두고 떠는 모습을 보더니 “괜찮아 쥬쥬, 준비해 온 곡을 할 수 있는 만큼 한번 해보렴”하고 아이를 오디션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일주일 후 오케스트라 내에 있는 플루트 콰이어의 합격 이메일을 받았다. 아직 쥬쥬의 실력은 초보지만 재능이 보여 팀원으로 참여시켜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쥬쥬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됐다. 이때부터 대학 입학 때까지 8년간 학업과 함께 음악 활동을 병행하며 꿈을 키워가게 된다.
꿈을 향한 자발적 참여
실리콘밸리 키즈의 학부모가 되면서 놀랐던 점은 학업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뿐 아니라 스포츠, 수학, 과학 등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오픈해 두고 자율적 참여를 유도한다. 그리고 일단 아이의 재능을 발견했으면 그 분야의 재능을 꾸준히 키워나가라고 조언한다..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때 아이들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중학교부터는 그 재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학업 이외에 본격적인 교과 이외의 활동 즉, extracurricular를 병행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게 된다.
"3.14159..."
쥬쥬가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길래 물어봤더니 매년 3월 14일이 '파이데이' 즉,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3자리를 기념하는 날이란다. 이날 학교에서는 더 많은 원주율의 숫자를 기억하는 아이들에게 무료로 진짜 파이(pie)를 준다고 했다. 파이 한 개를 얻어먹겠다는 아이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모습이 흐뭇했다.
"엄마, 나 오늘 수업 끝나고 수학테스트 하나치고 갈게."
쥬쥬는 종종 학교 방과 후 수학 테스트에 자원했다. 테스트를 보는 날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교문 밖으로 나왔는데 마치 게임을 하나 끝내고 오는 듯 즐거워 보였다. 자신의 수학에 대한 재능을 알고 싶으면 자발적으로 사인업을 하고 테스트에 참여하면 된다고 했다. 수학 테스트를 위해 미리 별도의 준비를 하거나 남들과 경쟁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우길래 단어 시험이 있냐고 물었더니 '스펠링비 spelling bee' 대회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는 영어 단어 스펠링을 누가 더 정확히 많이 맞추는지를 겨루는 대회다. 일단 반 대항으로 스펠링비 대회를 우선 치르고 학교 대표를 선발해 점차 시, 주, 전국으로 계속 올라가게 되고 최종 우승자는 상금 및 상장을 받게 된다.
이처럼 실리콘밸리 아이들은 수학, 영어 학습도 놀이처럼 즐기며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STEM 키즈로 성장
실리콘밸리에서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에 대한 관심 유발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과학 시간에 아이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정하고 개인별 프로젝트 계획을 제출한다. 이 계획에 따라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대형 보드에 만들어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한다. 이 중 좋은 연구로 뽑히면 교내외에서 열리는 '사이언스페어(science fair)'에 참여해 각 학교선생님 및 학부모, 학생들 앞에서 실험 결과를 평가받는다.
이 같은 연구 습관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과학에 관심 있는 아이들 중심으로 한층 더 심화된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STEM 분야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과학 올림피아드팀, 로보틱스 등 다양한 클럽 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각종 컴피티션에 참가해 교내뿐 아니라, 지역, 전국, 전 세계로 그 범위를 넓혀나가게 된다.
STEM 분야는 그 어느 지역보다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한다. 사이언스페어나 로보틱스 대회 등 관련 단체전이 있을 때는 학교 클럽룸이나 누군가의 집에 모여 밤을 지새우며 준비한다. 이 때는 실리콘밸리 지역 특성상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엔지니어나 과학자 부모들도 함께 조언자로 참여해 보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위한 불꽃 튀는 경쟁을 한다.
‘이 지역에 살려면 누구나 ‘사커맘(soccer mom)'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실리콘밸리에는 우리나라처럼 학원 버스나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다. 따라서 아이들의 다양한 외부 활동을 위해서는 그들의 시간관리 및 롸이드를 도와줄 부모들의 지원이 담보되어야 한다. 즉, 자녀의 extracurricular 활동을 지지하고, 긍정적으로 독려하며, 자녀의 성장과 발전에 집중하는 부모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호에는 초등학교 졸업 후의 <실리콘밸리 중학교 생활>은 어떤지 살펴보겠다.
스포츠 키즈의 활동
실리콘밸리 학교에서는 학업에 못지않게 아이들의 체력 단련 및 지구력 강화를 위해 엄격한 규칙을 적용한다. 대부분의 고등학교에는 학교 대표 운동팀(Varsity)이 있다. 미식축구, 테니스, 골프, 수영, 테니스, 워터 폴로, 야구 등 학교 대표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어야 가능하다. 스포츠 Varsity에서 활동하며 쌓은 수상기록은 추후 대학 입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경쟁도 매우 치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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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 키즈를 위한 컴피티션
실리콘밸리 초중고등학교에는 MathCounts, AMC(The American Mathematics Competitions), AIME (American Invitational Mathematics Examination), 매스올림피아드 USAMO (USA Mathematical Olympiad) 등 다양한 수학 컴피티션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