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생활이 궁금하면 발런티어에 참여하라
학교 발런티어에 사인업 해 주세요!
쥬쥬가 '학부모 발런티어'에 관한 가정통신문을 내민다.
초등학교에는 교장, 교사, 보조교사 외에도 '학부모 발런티어'가 꼭 필요하다. 발런티어의 영역은 정말 다양하다.
발런티어 리스트
-학급 활동 보조
-아트 클래스 준비
-북페어 / 인터내셔널 데이
-소풍 / 운동회 / 마라톤대회
-학습용 자료 만들기
-과학 실험 도구 준비 및 마무리 등등
발런티어 사인업 용지는 각 학급 앞 보드에 항상 붙어있었다. 하지만 우리 반이 ELD 학급이라 그런지 발런티어 사인업에 대체적으로 소극적이었다. Mrs.T 외에도 보조교사인 잉글랜드 출신 Mrs.R이 한 분 더 계셨는데 이 분은 아이들의 영어 리딩과 라이팅 첨삭만으로도 항상 바쁘셨다. Mrs.T는 학부모들과 마주칠 때마다 발런티어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미국 교육을 받은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일단 이곳 교육이 어떤지 궁금했고, 무엇보다 쥬쥬가 학교 생활을 잘 적응하는지가 걱정 됐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발런티어 활동은 이런 나의 니즈를 해결하는 데 최고의 선택이었다.
발런티어 맘 Mrs.Kim
Mrs.T 클래스에서는 거의 매일 다양한 과목의 퀴즈가 진행됐다. 영어, 수학, 사회(Social Studies), 과학 등 각 과목의 진도를 아이들이 잘 따라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매일매일 치르는 퀴즈 점수를 합산해 중간 성적을 내고, 수업 참여 및 출결, 또 별도의 중간고사 및 기말고사 점수를 합산해 한 학기 동안의 최종 성적이 매겨진다.
발런티어에 사인업 하고 첫 등교를 하니 교실 앞에 'Mrs.Kim'이라고 쓰인 명찰이 준비돼 있다. 첫 임무는 아이들의 수학 퀴즈를 채점하는 것이었다. 4, 5학년 콤보 클래스인 우리 반의 학생수는 총 25명인데 이 아이들의 수학 수준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앞에서 Mrs.T가 아이들과 수업하는 동안 나는 선생님 개인 책상이 놓인 뒷면 공간에서 아이들이 하루 전 날 치른 퀴즈를 열심히 채점했다.
그다음 임무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쓸 교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영어(Language Arts) 시간에 쓸 '리딩'용 교재를 선생님이 원하는 사이즈에 맞춰 25부씩 인쇄해 제본하는 것이다. 나는 교무실에 있는 복사기와 제본기를 이용해 부지런히 교재를 만들었다.
또 다른 날은 과학 실험 재료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겉이 보이는 투명 화분에 각기 다른 토양을 넣어 물의 흐름을 살펴보게 하도록 세팅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수업에 관한 다양한 발런티어만 해도 할 일이 산떠미였다. 하루 2시간 남짓 이런저런 일을 꾸준히 맡아했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급 아이들은 나의 등장을 낯설지 않아 했고, 만나면 "하이 Mrs.Kim"하고 인사해 준다.
행여 ‘발런티어맘의 아이는 뭔가 특혜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Mrs.T는 봉사가 끝나고 갈 때 나를 포함한 여러 발런티어맘들에게 간단히 "thank you!" 할 뿐이었다. 다만 학기가 끝날 때 학교에서 발런티어 부모들을 모아놓고 감사 행사를 가지는데, 학교 미팅룸에 커피와 간단한 다과를 차려놓고 교장선생님이 그동안 애써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주었다.
발런티어는 그저 나의 자투리 시간을 투자해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하는 사회 참여 활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활동은 내가 아이의 학교생활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또 미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필드트립 셰퍼론(Field Trip Chaperone)
초등 교육 과정에는 다양한 필드트립(field trip)이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을 인솔해 필드트립에 참여하는 일을 셰퍼론(chaperone)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두 시간을 쓰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하루 종일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참여해야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필드트립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 성당 중 하나인 Mission San Luis Obispo de Tolosa에 간 것. 학교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3시간가량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으로 아이들 5-6명씩 한 조로 나눠 인솔할 셰퍼론이 필요했다.
각 조별 아이들과 함께 유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곳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참관보고서 작성을 도와 제출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하루 전 날 미국 역사에 관한 자료도 좀 찾아보고, 현지에 도착해 아이들과 함께 그곳 해설가의 설명도 듣고, 과제물도 함께 작성하며 미국 교육시스템에 적응해 갔다.
NASA 방문도 기억에 남는다. 내 기억 속 로보트 태권브이를 소환하게 한 이곳 현장학습에 셰퍼론이 필요하다는 말에 얼른 사인업을 했다. 노란색 스쿨버스가 NASA 입구에 도착하자 군인들이 올라와 어른들의 신분을 재차 확인한다. 확실한 체류 신분이 아니면 출입이 어려웠던 걸로 기억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우주과학 기술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체험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했다. 셰퍼론으로서 아이들과 덩달아 열심히 다양한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던 값진 추억이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그 후 한참 뒤에 나온 <인터스텔라> 영화를 볼 때도 훨씬 몰입감 있게 관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거대한 땅덩이의 미국 사회가 무리 없이 잘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특별한 대가'없이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발런티어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서 아닐까?
학교 발런티어는 초등학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아이들의 각종 특별활동 - 사이언스페어, 오케스트라, 미식축구, 마칭밴드, 수영 등 각종 스포츠 -에서 학부모들의 발런티어는 필수적이다.
아이 초등학교 때 시작한 나의 발런티어 경험은 쥬쥬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다양한 분야의 활동으로 이어져 갔다.
헬리콥터맘?
2019년 미국을 뜨겁게 달궜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미국 유명 배우가 자녀의 대학입학 시스템을 조작하고 자녀를 명문 대학에 불법으로 입학시키려고 했던 일명 "Varsity Blues"다. 이 사건은 몇몇 부유층 부모들이 자녀를 명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서류를 위조하고, 대학 체육팀 및 특정 동아리에 미리 합류시키는 등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뉴스에서 많이 다뤄진 용어가 "헬리콥터 맘"이다.
부모가 자녀의 학업, 생활, 대인관계 등 모든 분야에 지나치게 개입해 자녀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경우를 빗대어 '헬리콥터 맘'이라고 부른다
실리콘밸리에 도착해 놀란 것 중 하나가 학부모들이 다른 여타 지역에 비해 소득 및 교육 수준이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지역에 유수의 빅테크 기업 및 미국 명문 스탠퍼드 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이 같은 통계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만큼 실리콘밸리 학부모 중에는 유독 '헬리콥터 맘'으로 보이는 분들이 많았다. 부모의 성공담을 앞세워 자신의 자녀들에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강제하려는 유형이다.
일례로 자녀의 특성을 살피기보다는 무조건 탑스쿨에서 컴퓨터사이언스나 의대 진학만을 고집하는 경우다. 이를 위해 부모가 어려서부터 자녀들의 학업 및 취미 활동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는 예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주관적인 견해임을 이해해 주시길...).
실제로 쿠퍼티노 학군에는 유치원부터 영재 테스트를 거쳐 입학을 허락하는 초등학교도 있고, 영어와 중국어를 어릴 때부터 동시에 가르치는 이중어 학교도 있다. 또한 수학 과목의 경우 제 학년 과정보다 한두 학년씩(심지어는 그 이상도)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매 학년 시작 전에 수학 플레이스먼트 테스트를 쳐서 패스하면 상급반으로 월반이 허락된다.
이 같은 과열 교육 양상 때문에 쿠퍼티노 학군(인근 산타클라라 카운티 내 학군 역시)은 거의 항상 미국 내 최고 학군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이 같은 과열된 교육열로 인해 때로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2015년, 15세 학생의 자살 소식은 이 지역 뉴스를 뜨겁게 달궜었다. 실리콘밸리 지역 교육시스템의 과열 양상에서 빚어진 폐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와 유사한 사건은 그 이후에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자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헬리콥터맘들로 인해 일부 아이들은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을 경험하고 자립심이 없는 아이가 될 수 있다는데 대해 공감한다.
나는 이 같이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아이 교육에 참여하고 싶으면 헬리콥터맘이 아니라 '발런티어맘'이 돼라"라고 조언하고 싶다.
'싸커맘'은 또 무엇?
싸커맘(Soccor Mom)은 1990년대 중반 미국 중산층과 상류층 가정의 부모들이 자녀의 스포츠 경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경기장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에서 유래됐다. 주로 자녀의 다양한 활동에 함께 참여하며, 특히 학교나 체육활동에 큰 관심을 두는 부모를 일컫는다. 싸커맘은 자녀의 다양성과 경험을 존중해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지나치게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휴식 시간이 부족할 수 있고, 과도한 압박을 줄 수도 있다고 한다.
실리콘밸리, 아니 미국에서 아이 교육에 신경 쓰는 부모라면 대부분 사커맘의 범주가 아닐까 싶다. 한국처럼 학원버스가 다니지 않고,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지 않아 아이가 학교 외에 어떤 과외 활동을 하고자 하면 부모의 ‘라이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커맘’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다재다능한 실리콘밸리 키즈>에서 다시 다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