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한인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뒤 맞이한 첫 일요일, 우리는 자카르타 시내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전날 목사님께 인사 전화를 드리자 일요일 아침에 차를 보내 주겠다고 했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초행길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씀에, 차를 구입하기 전까지 도움을 받기로 했다.
교회에 도착하니 목사님 내외와 교인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낯선 나라에서 한국 분들을 뵈니 모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믿음이 없던 사람도 외국에 가면 교회에 나가게 된다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목사님은 정착에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데뽁에 사는 선교사도 소개해 주었다. 돌아보면 우리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이런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예배 후 점심 자리에서 생활 유의점도 들었다. 그중 하나가 물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돗물을 마시지 말고 양치에도 사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석회질이 많아 치아가 상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후 양치도 생수로 했다. 현지에서 ‘아쿠아’ 생수가 무난하다고 하여 사용했지만, 어떤 분은 물통에 침전물이 보였다며 정수기를 권하기도 했다. 의견은 엇갈렸지만, 우리는 보다 안심되는 방법을 택했다.
이처럼 작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활의 틀이 잡혀 갔다. 야자수 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나라의 아침 공기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집과 이삿짐
방문자 숙소에서 한 달 남짓 지냈다. 통상 해외 파견 교수에게는 숙소가 제공되지만, 인도네시아대학교는 사정상 제공이 어려워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월 300달러를 주거비로 보조해 주었다. 우리는 수업을 마칠 때마다 집을 보러 다녔다.
처음엔 자카르타의 아파트를 알아봤지만 너무 비쌌고 학교와도 멀었다. 학과장 교수가 학교 근처 ‘쁘소나 카양안’이라는 주택 단지를 소개해 주었다. 도로변 야자수가 인상적인 깨끗한 단지였다. 몇 군데 둘러본 끝에 2층의 넓고 단정한 집을 월 50만 원에 계약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보통 연 단위 계약을 하고 월세 1년 치를 선납한다. 계약 기간이 길수록 할인해 주어 우리는 2년 계약을 맺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이 부두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곧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수령을 위해 노동허가서가 필요했다. 많은 이가 이 서류를 제때 받지 못해 벌금을 냈다기에 한국에서부터 학교에 거듭 부탁했지만 서류는 나오지 않았다. 2주가 지나자 보관료가 붙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곧 나온다”고 했지만, 과태료만 불어 갔다. 결국 “벌금과 과태료를 부담할 테니 짐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놀랍게도 이튿날 서류가 발급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고의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짐이 도착하자 비로소 사람 사는 집이 되었다. 가장 반가운 것은 침대였다. 그동안 캠핑용 고무 튜브를 임시로 사용했는데, 함께 누우면 한쪽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려 잠을 설쳤다. 꼭 피난살이 하는 기분이었다.
학과장은 산더미 같은 짐을 보고 “이민 온 것 같다”고 웃었다. 한국에서 꽤 많이 버려리고 갔는데도 컨테이너가 가득했다. 침대, 책장, 책상, 약간의 주방 기구, 무엇보다 책이 많았다. 한국 관련 서적을 현지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져온 책들이었다. 사실 내 마음도 ‘이민’에 가까웠다. 2년 뒤를 장담할 순 없었지만, 가능하다면 여기서 제2의 인생을 제대로 꾸려 보고 싶었다. 아내도 80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또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은 어렵다며 인도네시아에 정착하길 바랐다.
뻠반뚜와 쏘삐르
현지 교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뻠반뚜(가사도우미)’와 ‘쏘삐르(운전기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생활의 편안함이 이 두 사람을 잘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도 있다.
많은 가정이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는다. 빨래, 청소, 아이 돌봄, 요리 등 역할도 다양하다. 언어·문화 차이로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 이해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운전기사도 비슷하다. 운전석이 오른쪽이고, 차선 질서가 우리와 달라 자가운전이 위험할 수 있다. 2차선 도로를 4차선처럼 쓰거나, 오토바이가 차 사이를 곡예하듯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도 처음에는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니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므로 불편한 일들이 종종 생긴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대체로 많은 도움을 준다. 인도네시아어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무슨 문제가 생길 때 해결사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차가 달리던 중 갑자기 '쾅 ' 소리와 함께 앞에서 오토바이가 넘어졌다. 오토바이가 유턴하며 갑자기 끼어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듯했다. 기사는 나에게 차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면서 10만 루피아를 달라고 했다. 그는 오토바이 운전자를 부축해 길가에 앉히고 구급약을 발라 주었다. 잠시 뒤 돌아 온 그는 오토바이 운전자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돈을 돌려주었다. 그날, 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교통경찰과 공무원의 비리
지금은 교통경찰을 도로에서 보기 힘들지만, 정착 초기에는 교통경찰의 비리가 매우 심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교통경찰이 운전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자카르타는 교통이 복잡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빤쪼란’이라는 곳은 매우 복잡한 교차로이다. 게다가 교통경찰이 항상 지키고 있어서 운전기사도 이곳에 오면 긴장한다.
어느 날 우리 차가 경찰에게 잡혔다. 신호등이 초록색이어서 전진했는데 이내 빨간색으로 바뀌는 바람에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운전기사는 나에게 5만 루피아만 달라고 했다. 10만 루피아밖에 없다고 하자 기사는 탄식하면서 그 돈을 가지고 나갔다.
그는 웃으면서 경찰과 함께 고가도로 밑 으슥한 곳으로 가더니 이내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나에게 5만 루피아를 돌려주었다. 경찰이 거스름돈도 주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기사는 나에게서 빌린 돈이라 나중에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좀 깎아 달라고 했더니 깎아 주더라는 것이다.
정착 초기에는 공무원 비리도 심했다.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 비자 문제 때문에 서울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근무하는 인도네시아인 여성 직원이 말하기를 인도네시아에 가면 관공서에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하지 말고 ‘아겐(중개인)’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나는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잘 모르니까 그래야 하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인도네시아에 온 지 1년이 되어 비자 연장 문제 때문에 이민국에 갔는데, 이민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자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더욱 후덥지근했다. 그런데 학교 ‘아겐’이 이미 나와 있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인사를 한 후 그녀를 따라 이민국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사무실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한 서양인이 우리를 따라 들어왔다. 늦게 온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니 그도 따라 들어 온 것 같았다. 그러자 사무실에 있던 직원이 그에게 큰소리로 나가라고 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나갔다. 그 광경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그 서양인처럼 민망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운전면허를 연장하러 갔을 때 일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산 지 5년이 넘었고 인도네시아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겐’ 없이 혼자 갔다. 그랬더니 직원이 서류 준비가 미흡하다고 다시 준비해 오라고 했다.
다음날 또 다른 요구를 했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준비해서 다시 갔다. 직원이 서류를 보더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니까 직원들이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나와서 다시 기다렸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내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짜증이 나서 다시 들어가 볼까 했는데 마침 이웃에 사는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운전면허를 연장하기 위해 ‘아겐’과 함께 왔다고 했다. 나는 ‘아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내 일도 부탁했다. 그랬더니 몇 분 안 되어 새로운 면허증을 받아 왔다.
정착 초기만 해도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의 비리는 심각했으나 지금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공항이다. 예전에는 인도네시아에 입국할 때 항상 불안했다. 직원들이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직원들은 무언가 하자가 있다 싶으면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물론 흥정도 가능했다.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많아서 깎아 달라고 하면 깎아 주었다. 그런데 귀국할 무렵 공항에서는 이러한 광경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가 많이 변하고 있었다.
수카르노하타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