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은 하늘나라에

대가족 이야기를 끝내며...

by 지니





코로나가 성행하기 시작한 19년 12월의 어느 날 엄마는 식음을 전폐하고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그때는 좀 심각한 단계라 판단이 되어 마지막일지도 모를 엄마의 모습을 돌아가면서 뵈었었다. 며칠 드시지 못해 몸이 말라있고 콧줄이 끼워져 있었다. 어떤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른다. 아마도 엄마 본인만이 알 것이다. 며칠 뒤 일반 병실로 옮겨진 엄마의 상태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병원으로 옮겨 한 달 반 정도 입원해 계시다가 다행히 호전이 되어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엄마를 돌봐 드려야 하는데 마땅히 그럴 상황이 다들 안되었다. 그 당시 나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형제들 상의 끝에 내가 일을 그만두고 엄마를 돌봐드리기로 했다. 우리 집과 부모님 집을 매일 오갔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그 당시 당분간은 부모님 집에서 먹고 자고 했어야 했는데 그게 여의칠 않았다. 나도 내 집 살림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왔다 갔다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무엇을 막론하고서라도 엄마 옆을 지키고 있어서야 했다. 그런 결단이 부족했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엄마의 몸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살도 붙고 음식도 잘 드셨다. 특히 내가 해 드리는 음식을 잘 드셔주셨다. 김밥, 부침개, 김치찌개, 깍두기 등을 해드리면 다 맛있다며 잘 드셨다. 부모님 댁 가기 전에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바리바리 싸가기도 했다. 한 번씩 내가 사는 곳 주변 맛집에서 음식을 포장해 가기도 했었는데 그건 참 잘한 일이었다. 내가 먹어보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꼭 부모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장해 가면 두 분 다 맛나게 잘 드셨다.




4월 중순 유난히 해가 뜨겁던 어느 날, 아버지와 외출을 다녀오셨다. 아버지의 은행 업무였는데 엄마도 바람 쐴 겸 함께 길을 나선 거였다. 그런데 은행에서 생각보다 많은 대기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볼일을 다 본 후 두 분은 집으로 무사히 오셨다. 그러고 나서 엄마의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도 그날 오랜 시간 밖에 나가 있어서 몸에 무리가 된 것 같았다.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괜찮아지는 듯했다. 5월 중순 이사 준비로 더 이상 부모님 댁을 가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주변에 동생들도 살고 있었기에 동생들이 왔다 갔다 하면 될 터였다.




6월 중순에 울산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이사 잘했다고, 여기 앞 뒤로 뚫려 전망이 아주 끝내준다고, 며칠 뒤에 집에 놀러 오시라고...

그러고 난 2주 뒤쯤의 어느 날 아침, 형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 끝내 말을 잊지 못하며... 장모님이..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믿기지가 않았다. 2주 전 멀쩡히 통화를 했었는데 돌아가셨다니 꿈만 같았다. 그때 통화 속 엄마는 내게 그랬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그 말만 하셨던 게 생각났다. 나중에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가 다들한테 그렇게 말씀했다고 한다. 우리는 아무도 몰랐지만 엄마 본인은 아셨던 것 같다. 엄마의 마지막을...




엄마의 장례식은 평안했다. 살아생전 아프고 힘들며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마무리하고 눈물도 고통도 없는 나라로 가셨으니 말이다. 이모는 눈물이 안 난다고 하셨다. 누구보다도 옆에서 엄마를 지켜보고 계셨는지라... 고통 없는 곳으로 간 것이 더 나을 거다... 란 마음에서 그러셨으리라. 엄마의 장례식장은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시는 분들이 다들 놀라 하며 장례식장 분위기 같지가 않다고 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어딜 가도, 무얼 해도 엄마 생각이 났다. 마트에 단배추만 봐도 엄마 생각이... 물김치를 많이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밥을 먹어도, 길을 걸어도...




홀로 되신 아버지는 큰 슬픔을 감당하며 지내셔야 했다.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도 컸기에 말이다. 아버지는 편마비라는 불편한 몸으로 20년 가까이 사셨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엄마도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것이다. 엄마가 아버지의 부족한 수족이 되어주느라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느라 말이다. 홀로 되신 아버지를 누가 모시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키워도 열 자식은 한부모를 못 모신다... 는 시이모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딱 그랬다. 형제가 다섯이니 우리는 돌아가면서 아버지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인근에 동생네가 살아서 시간 날 때마다 방문을 하고 주말이면 언니가 방문하고 나도 주중에 한 번씩 방문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6개월이 된 시점에 아버지는 많이 야윈 모습을 하고 계셨다. 그 해 여름이 아주 더웠는데 그 때문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다음 해 5월 어린이날이었다.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남동생을 불러 함께 병원을 가게 되셨다.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의사는 당장 수술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의 몸에 뭔가가 발견된 것이었다. 수술날이 되고 모두의 간절함이 담긴 기도 덕분인지 수술이 잘 끝났다. 회복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약이 기도로 넘어오는 바람에 모든 기능이 엉켜버렸고 다시 재 수술을 하기에 이르렀다. 재 수술을 감당한 탓이었을까 아버지는 끝내 회복을 못하시고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으시게 되었다. 의료진들은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보려고 발버둥 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깨진 독에 물 붓기였을까... 급한불을 끄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아버지는 재활병원으로 옮겨가게 되셨다. 그리고 석 달 뒤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그때도 코로나가 갑자기 심해져서 면회가 자유롭지 못했는데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게 2주일 전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알려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잘 맞지 않아서 우리 5형제 중 아무도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모두 장례를 치를 병원으로 한달음 달려왔는데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만져봤는데 아직 따뜻했다.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게 영영 아쉬움과 한으로 남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엄마가 떠나시고 1년 4개월 만에 눈을 감으셨다.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우리 형제들은 당장 갈 곳이 없어졌다. 가고 싶을 때마다 자유롭게 갔던 친정이 없어지고 나니 괜히 서러움이 차올랐다. 우리는 이제 고아가 되었던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잃었지만 영적 부모이신 아빠 아버지가 계시니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는 부모님 기일이 되면 거제도 산소에서 매년 모인다. 산소에 다 함께 모여 부모님께 인사드린 뒤 인근 음식점에 들러 함께 밥을 먹고 풍경 좋은 카페에서 차 한잔씩 마시고 담소를 나누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두 분은 우리랑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했지만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거제도 산소를 갈 때는 꼭 소풍을 떠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갈 때마다 맑은 하늘을 선물 받으니 참 신기했다. 부모님 두 분도 우리와의 만남을 반갑게 여기셨을 것 같다. 두 분 덕분에 우리 형제들이 서로 의지하며 우애 있게 잘 지냅니다. 엄마, 아버지... 우리 다시 볼 그날을 기다리며 눈물도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십시오. 곧 만나겠지요...




... 그동안 <대가족 이야기>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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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