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참 좋아한다. 강아지와 함께 사는 인간으로서 ‘개’라는 동물에 특히 더 유대감을 느낀다. 그래서인가 유독 ‘개’가 눈에 밟힌다. 건물 주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영상 속 대피하는 사람들 사이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개가 보인다. 온통 잿빛으로 변해버린 도시, 폐허가 되어버린 거리 속 떠돌이 개가 보인다. 전쟁 속 개의 모습을 보며 “저 개들의 집은 어디였을까? 저 개들도 같이 다니던 친구들을 잃었을까?” 생각한다. 가자지구에는 또다시 포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개가, 고양이가, 작물이, 들꽃이, 나무가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피해액이 약 67조라고 한다. 67조라는 숫자 속에는 나무 몇 그루의 값이 들어 있을까? 떨어지는 폭탄을 맞고 죽어버린 동물 몇 마리의 값이 더해져 있을까? 과연 67조 면 충분할까? 그보다 더 궁금한 건 과연 숫자로 환산할 수 있긴 한 걸까?
주디스 버틀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애도의 범위’라는 글을 썼다. 버틀러는 이 글에서 전쟁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의 삶이 애도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가?”다. 버틀러는 “만약 지배적인 프레임이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사람들의 삶을 더욱 애도할 만한(grievable) 것으로 여긴다면, 다른 일련의 죽음보다 특정한 일련의 죽음을 더욱 끔찍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누구의 삶이 애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 것은 누구의 삶이 더 소중하냐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애도의 범위’ 中)고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삶의 가치 또한 책정하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끔찍한 상실로 여겨지고, 누군가의 죽음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때, 우리는 이들의 삶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삶의 가치가 평등하지 않은 세상에서 공존을 위한 평화를 꿈꿀 수 없다.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침략자 집단 혹은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명명하기 전에 이들의 죽음을 동등하게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넓은 범위의 애도로부터 비로소 더 이상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움직임, 곧 반전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버틀러가 이야기하는 ‘애도할 만한 삶’의 범위를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까지 넓히고 싶다. 인간 사이의 혐오와 증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생명이 파괴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전쟁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비단 인간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고기 처먹으면서 이런 말 잘도 쓴다는 비난을 받기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기 전까지 그 땅에 살며 자연을 이루었던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풀, 나무, 개, 고양이, 노루 모두 충분히 애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이다. 전쟁을 멈추는 일은 인간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지금 당장 전쟁은 멈춰야 한다.
내가 지금 이렇게 쓴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걸 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다. 남한반도에 사는 아무개도 이렇게 간절했음을 남겨둬야지.
주디스 버틀러, <애도의 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