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도 많지
여의사의 3대 복은 함께 일하는 간호 조무사복, 시어머니 복 그리고 아이 봐주는 육아 도우미 복이다. 그중 제일은 육아 도우미 복이라고들 한다. 일도 육아도 놓을 수 없는 여의사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아침 8시. 아파트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출근시간에 집에서 나서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은 업무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가정집이 직장인 사람들이다. 오늘 아침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한 50대 중년 여성은 후자인 것이다. 나의 친정 엄마와 마찬가지로.
넌 정말 복도 많다.
나는 복 받았다. 동료 여의사들이 나를 가장 부러워한다.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마음 편히 병원으로 출근하며 내가 가진 큰 복을 감사하게 여긴다. 친정 엄마가 없었다면, 내 집과 내 안의 평화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평생 쉰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는 버스 안내 양, 공장의 여공이었다. 결혼 후에도 집에서 나와 동생을 키우며 부업을 했다.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커버린 이후에도 엄마는 늘 직장을 구해왔다. 쉬면 병난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쉴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의 여성이 된 엄마가 할 수 있는 직업은 줄어들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엄마의 직업 세계는 오히려 확장되어 갔다. 주방의 식당, 홀 서빙을 거쳐 5년 전부터 엄마의 직업은 손녀를 봐주는 ‘외할머니’가 되었다.
외할머니가 되기 전 엄마의 마지막 직업은 '이모님'이라고 불리는 육아 도우미와 산후 도우미였다. 잠시만 할 거라는 엄마의 마지막 직업은 딸인 내가 결혼 후 4년 동안 임신이 되지 않자 어느새 베테랑 '이모님'이 되어 있었다.
출산 직후 친정 엄마와 함께 산후조리를 했다. 엄마는 갓 태어난 아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만신창이가 된 나를 보살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벼락치기로 아기를 낳았는데 엄마는 산후 도우미로, 그리고 육아 도우미로 이미 여러 번 푼 기출문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초보 엄마가 된 나는 엄마의 직업 세계에 초대되었다.
일주일 중 6일을 엄마와 마주하며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갔다.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 학창 시절 누리지 못했던 그때의 시간을 이제야 보상받는다. 그 시간 틈틈이 엄마는 자신의 마지막 직업이었던 '이모님' 세계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이모님'으로 살았던 엄마의 직업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엄마의 수다에 귀 기울였다.
엄마는 아이 돌보는 일에 진심이었다. 평상시에 무감하던 엄마는 아이만 보면 다감한 사람이 된다. 더 이상 그들의 ‘이모님’이 아님에도 엄마는 아이들의 성장을 궁금해하고 아이 엄마와 여전히 연락을 한다. 괜찮은 이모님으로 평판이 났던 엄마였다. 나의 출산과 동시에 퇴사를 했지만, 수많은 여의사들이 찾는 일등 이모님은 아마 나의 친정 엄마일 것이다.
어느 직업이든 프로의 세계에는 고단함이 따른다. 속상했던 일들도 적지 않았다. 돌보던 아이의 집에 물건이 없어져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다. 난생처음이었다. 없어진 물건은 안방 장롱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현금 다발이었다. 6살, 2살 남매를 돌보는 것이 엄마가 맡은 임무였고, 거실에서 아이들과 놀아준 일이 전부였던 엄마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사건이 일어난 날. 그 시간에 그 집에 있었던 외부인 중 한 사람으로 경찰의 부름에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같은 장소에서 다른 일을 했던 청소 도우미도 함께였다.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의 도우미를 지켜보던 그 집 6살 첫째 딸아이가 소리쳤다.
" 저기 청소 이모가 하얀 바탕에 초록색 줄무늬 장갑을 끼고 안방 장롱을 청소했어요."
6살 첫째 아이의 증언으로 엄마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어 참고인 신분이 되었다. 그 집 첫째 딸아이가 아니었다면, 억울한 누명을 쓸 뻔했던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몇몇은 그들의 살림을 돌봐준다는 이유로 엄마를 경시하곤 했다. 돌봄 도우미 업체의 긴급한 연락으로 하루만 아이를 봐준 적이 있었다. 5살 남짓 되는 남자아이였다. 그 집은 처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 키우는 엄마라면, 아이를 맡길 때 끼니 걱정을 가장 먼저 한다. 보통 몇 시에 밥을 먹는지, 아이의 반찬까지 알려준다. 그 집 엄마는 일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어 오자, 친정 엄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준비된 반찬이라고는 계란뿐이었다. 보통의 아이라면 좋아할 계란말이를 하고 된장국을 끓였다. 입이 짧았던 건지,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아이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늦은 오후 아이 엄마가 돌아왔다. 돌아온 제 엄마를 보자,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화가 잔뜩 난 고용주 아이 엄마는 A4 종이 한 장을 식탁에 올려놓고, 친정 엄마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시간대 별로 뭘 먹었는지 적으세요.”
그 집 엄마의 고압적인 태도에 친정 엄마는 울컥했다.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계란뿐이었고, 그걸로 어떻게든 먹이려고 애썼는데 먹지 않았던 아이를 두고 뭘 더 어떻게 해야 했을지 되물었다. 결국 소란이 일어났다. 엄마는 그 집 아이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곳을 뛰쳐나왔다.
그 일을 전하는 친정 엄마의 목소리는 흐릿했다. 엄마의 눈동자 안에 투명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끝내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고 속으로 삼키는 엄마를 보았다. 가슴이 쓰라렸다. 다짐했다. 엄마의 직업이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엄마의 마지막이자 평생 직업이 내 아이를 돌보는 '외할머니'로 남아야 한다고.
수많은 여의사들이 찾는 일등 이모님은 온전히 내 차지다.
엄마는 아무리 일을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자신의 일을 찾아낸다. 엄마가 손녀 봐주는 외할머니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또 다른 직업의 세계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내가 출근을 해야 엄마는 손녀 봐주는 외할머니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출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와 남동생을 키우면서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고 아등바등 살아왔던 엄마. 엄마에게서 나를 본다. 엄마를 닮은 나 역시 평생 일하고 살 팔자다. 만년 마음껏 일하고 살라고 엄마는 기꺼이 나를 도와준다. 젊었을 적 엄마가 받지 못했던 친정의 도움을. 나를 위해 아끼지 않는다. 친정 엄마가 받지 못했던 몫까지의 복을 내가 갑절로 받았다.
매일 엄마와 바통 터치를 하며 속으로 되뇐다. “나는 참 복도 많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받은 복을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엄마가 고생했던 만큼에 더해. 나와 내 딸이 받았던 사랑의 곱절로 다시 엄마에게 되돌려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