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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Oct 24. 2021

남편도 의사세요?

결혼에도 족보가 있나요?

의과대학, 레지던트 때 방대한 학업량을 어떻게 다 소화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사이엔 족보가 내려오고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 족보 없이는 의대를 졸업하지도,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답만 적혀 있는 족보는 아무도 묻고 따지지 않는다. 족보는 그 자체로 오랜 시간 살아남는 법이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남편도 의사세요?"라고 스스럼없이 배우자의 직업을 묻는다. 의사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자 의사들의 세상이다. 남자 의사들은 다양한 직군과 결혼하는 것에 비해 여자 의사들의 배우자 대부분은 의사다. 이토록 많은 여자 의사들이 남자 의사와 결혼하는 이유는 여자 의사의 결혼에는 족보가 있기 때문이다.


결혼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결혼할 무렵 곁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 의사들은 결혼 적령기인 20~30대를 의대생, 인턴, 레지던트의 신분으로 지낸다. 그쯤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의대생, 인턴, 레지던트들이다. 오히려 병원 밖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희박하며 수고스러운 일이 된다.


그렇다고 남자 의사와의 연애가 손에 잡히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발에 채는 게 의대생, 의사라도 나와 눈 맞기란 얼마나 어렵던지. 남녀 모두가 결혼을 염두에 두는 인턴, 레지던트 수련 기간에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병원. 그 안에서 깔끔하게만 하고 다녔어도 괜찮았을 텐데. 눈곱만 간신히 떼고 나온 서로에게 호감이란 쉬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 깨끗이 눈을 씻고 괜찮은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근무했던 병원에서 내 짝은 만나지 못했다.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했다. 병원은 사랑하기에 열악한 환경이다. 그 안에서 사랑할 여유가 없었다. 내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누군가에게 일어나기도 했다. 삭막한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기 마련이듯. 병원 내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기도 한다. 


병원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이들은 외부로 눈을 돌린다. 병원 밖에서 짝을 찾는 여자 의사들의 선택지는 다양하지 않다. 소개의 소개를 받기 때문에 다시 또 의사를 소개받을 확률이 높다. 배우자의 직업으로 의사를 바란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인들의 배우자 대부분이 의사고, 예로부터 여자 의사의 배우자는 남자 의사라는 족보가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족보에는 이유가 있다. 남자 의사는 그간의 의대 생활과 병원이라는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다. '현재 직업 의사'는 성실함을 보장해 준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연봉 수준도 비슷하다. 여자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유지, 이해하는 데에 남자 의사만 한 사람이 없다. 주변인들의 욕구도 충족되는 일이다. 힘들게 공부한 내 딸이 같은 직종인 의사를 만나는 것이 덜 억울하겠다는 부모님의 긍정도 한몫한다.


타인의 시선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여의사 배우자의 직업을 확인하려 한다. 의사가 아니었음이 밝혀졌을 때 더 궁금해한다. 변명처럼 배우자의 직업을 드러내거나 감추기도 한다. 그러니 딸이 사윗감으로 의사 아닌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반대하는 부모님들의 심정도 이해할 법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사위도 의사냐'라고 많이도 물어볼 것이다. 


웬만하면 정답을 찍어왔던 여자 의사들은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남들이 선택한 답, 족보의 답을 적어내고 싶어 한다. 본인도, 부모님도, 주변인들도 최소한 배우자가 의사라면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덮어놓고 의사면 괜찮다고 여긴다. 신랑감이 '의사'라는 직업을 빼면 진행되지 않았을 결혼이 성사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여자 의사들이 남자 의사와 결혼을 한다.


결혼은 함께 잘 살아 보기 위함이다. 타인과 한 집에서 부대끼는 노력을 하는 것은 함께 있을 때 잘 살아보려는 에너지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반드시 잘 사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잘 사는 것에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로움도 포함한다. 반드시 남자 의사만이 그 둘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잘 살아보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의 배우자를 택했지만, '의사 배우자'라는 것만 손에 쥐고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기도 한다. 족보 없이 시험을 치러내지 못했던 족보 인생 여자 의사들은 남들이 말하는 것, 남들이 가는 길이 당연한 정답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간 무턱대고 믿어왔던 족보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아직 답을 적어내지 않은 여자 의사들의 정답 찾기는 계속된다. 인생은 끝까지 정답이 없는 것이지만, 결혼을 코앞에 둔 이들은 결혼의 정답을 찾고 싶어 한다.


반드시 결혼을 고집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결혼 상대자 찾기에 전전 긍긍하지 않는다. 여의사는 의사기 때문에 남자 의사와 결혼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결혼 후에는 원장 사모님만 하면 좋겠는데, 결혼을 한다고 해서 여의사의 쓸모는 사라지지 않는다. 좀처럼 일을 손에 놓을 수 없는 여의사에게 결혼은 임신, 출산, 육아라는 원장 사모의 역할만 더할 뿐이다. 무거워지기만 하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보다 넓은 직종의 사람들 속에서 배우자를 찾는다. 괜찮은 남자 의사들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가 더 이상 모든 걸 보장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신중해진 그들이 눈여겨보는 것은 가치관이다. 아무리 비슷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라도 가치관에는 차이가 있다. 담배는 몸에 해롭다는 것을 잘 아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흡연자와 비흡연자는 존재하는 것처럼.


결혼에서 배우자라는 정답을 반드시 의사들 사이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인생에 있어서 같은 방향을 향하는 사람.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을 찾는 일이 결혼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여의사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족보는 한 번쯤 업데이트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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