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살리기>
사람의 죽음 앞에서 언제나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 건 필연적이다.
더더욱 내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나를 하염없이 무너지게 만든다.
응급실에 일하면서 수많은 CPR 환자들을 마주하고
처치하며 한 번쯤은 생각해 봤던 내 가족의 죽음.
부디 내 손으로 내 가족의 차갑게 굳은 심장을
마사지하는 일이 없기를,
이 딱딱한 베드에 내 가족이 차갑게 식은 채로
눕는 일은 없기를 수없이 바라고 또 바라왔던 나였다.
2년 전 조금 쌀쌀했던 11월 초였다.
친구의 생일을 늦게나마 축하해 주기 위해 만났던 날.
오래간만에 한껏 꾸미고 나와서 기분이 좋았고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줄 생각에 신나게 들떠 있었다.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에 가서 술을 마시며
생일축하도 해주고, 2차로 조용한 와인바에 가서
같이 와인을 마시고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렇게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낸 뒤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한껏 올라 있었던 나는
일찍 잠드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원래도 늦게 자는 게 습관이라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재밌는 유튜브 영상들을 보고
혼자 피식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좀 잠들어볼까 싶어
씻고 나와 폰을 만지던 그 순간,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아빠의 카톡이 도착했다.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그 카톡을 본 순간 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내가 술을 너무 과하게 마신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불어나더니,
온통 내 머릿속을 헤집으며 굴러다녔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카톡을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전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고
이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에게 바로 전화를 건 나는
이게 다 무슨 말이냐고, 할머니가 왜 돌아가시냐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게 말이 되냐며
아빠에게 울면서 따지듯이 말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하시려는
아빠의 떨리는 목소리와 말투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이건 꿈이 아니구나.
전화를 끊고 난 후 엉엉 소리 내며 미친 듯이 울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나를 두고 가셨을 리가 없는데.
다시 엄마와 아빠의 연락이 올 때까지
옷을 꺼내 입고 울면서 가방을 챙겼다.
그렇게 한참 울다 보니 아빠의 전화가 왔고,
아빠 차를 타고 할머니가 계시던 병원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다 거짓말 같았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같았다.
아, 이런 걸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는 거였나.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내가 멋모르고 웃으며 보냈던
몇 시간 전의 모습이 떠올라서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게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해 주셨다.
할머니가 어제 이상하리만큼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하셨더랬다.
원래도 소화가 잘 안 되셨던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셔서
처음엔 동네 한의원을 가서 침을 맞았는데,
이상하게 더 체한 느낌이 들고 속이 안 좋았다고.
이후 동네 내과를 가서 체한 걸 가라앉히는
수액까지 맞고 집으로 가셨는데,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기만 할 뿐,
체한 게 전혀 나아지지가 않아
고모를 부르셔서 함께 작은 종합병원에 가셨더랬다.
그랬더니 거기서 피검사와 심전도를 해보더니
환자분 지금 응급상황이라며,
당장 시술 가능한 큰 병원으로 가라고 얘기했다고.
그래서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던
더 큰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고,
그곳에서 바로 심근경색을 진단받으시고
심장 스텐트 시술을 하러 수술실에 들어가셨단다.
다행히 시술은 잘 마무리 됐고,
할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의식을 차리신 뒤
씩씩하게 저녁으로 죽까지 다 드셨다고 했다.
그래서 고모는 짐을 챙기러 집에 가셨다가
한시름 마음 놓고 주무시고 계셨는데,
몇 시간 뒤 갑자기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와서는
할머니가 지금 응급상황이라
CPR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으니
당장 병원으로 오시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
1시간이 넘는 CPR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주차장에 도착한 아빠와 나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가 아직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장례식장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격리방에 누워계시다는 얘길 들었다.
한 편으론 코로나가 원망스러웠던 나였지만
또 한 편으론 그 순간 잠시 고맙기도 했다.
이렇게 뒤늦게라도 내가 할머니 얼굴 한번 볼 수 있고, 마지막으로 할머니 손 한번 잡아볼 수 있어서.
내겐 너무 익숙한 격리 가운과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할머니가 계신 격리방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너무 평온하게 주무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시곤 웃으며
나를 반겨주실 것 같은 얼굴.
아직 핏기가 다 가시지 않은 피부와
미세한 온기가 남아있던 그 손.
할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며
"할머니.. 할머니"
하고 몇 번이나 불렀던 나였다.
다들 너무 많이 울고 계셨고,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아 그 자리에서 눈물이 안 났다.
그저
‘왜? 어째서?’
라는 질문만 계속해서 머릿속에 되뇌고 있었다.
의문을 떨칠 수 없었던 나는
잠시 스테이션으로 향했고
조심스레 거기 계신 간호사분께 여쭤봤다.
"선생님, 제가 ㅇㅇㅇ님 손녀인데요.
CPR를 1시간 넘게 하셨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그동안 *ROSC가 한 번도 안 됐었나요?"
*ROSC ( 자발적 순환 회복 :
Return Of Spontaneous Circulation
: 심정지로 인해 심폐소생술 시행 도중
자발적으로 심장이 움직이며
맥박이 다시 촉지 되기 시작함을 뜻하는 의학용어)
ROSC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내 질문을 들은 간호사분은
단번에 내가 최소한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챈 모습이었고, 곧장 대답해 주셨다.
"네, 보호자분. 안타깝지만 저희도 최선을 다했는데.. 한 번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에피를 10개나 썼고 저희가 1시간 넘게
CPR을 계속했지만 ROSC가 한 번도 되지 않아서.."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1시간이 넘는 CPR, 10개나 쓴 에피네프린.
나는 이 과정을 세세히 다 알고,
내가 제일 가까이에서 행했던 사람이기에
간호사분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고
머릿속에 그 급박했을 상황들이 다 그려졌다.
여기 계신 의료진들이 모두 달라붙어
분명 열심히 CPR을 쳤을 것이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시로 교대해 가며
땀이 온몸에 줄기차게 맺혀 흐르더라도
가슴압박과 암부를 짜고, 약물을 투여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 또한 그리 해왔으니까.
"네, 선생님. 고군분투해 주셨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해요."
간호사분께 짧은 감사인사를 건네곤
다시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병원을 세 군데나 갔던 바람에
너무 지체 돼버려 놓쳐버린 골든타임,
할머니가 생전에 가지고 계셨던 기저질환과 연세,
시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어쩌면 몸 안에서 돌아다니던
또 다른 색전이 다른 혈관을 막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할머니는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ROSC가 되지 않을 만큼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
이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또렷하게 된 내가
다시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자
너무 눈물이 났다.
우리 할머니, 많이 아프셨겠다. 정말 많이 아프셨겠다.
심근경색인 줄도 모르고
그저 체했다고만 생각하셨을 당신은
얼마나 갑갑하셨을까, 또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할머니가 느끼셨을 그 순간들의 두려움,
불안함과 고통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아봤지만 참아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와중에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한 번도 ROSC 되지 않아서
차라리 감사하다는, 그런 생각.
우리 할머니가 이 1시간이 넘는 CPR 동안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 부러진 뼛조각들이
폐를 찌르는 이 숱한 고통들을
단 한순간도 느끼시지 못하고
그렇게 눈 감으실 수 있어서.
그래, 끝내 다행이다.
차라리, 차라리 감사하다.
그 생각을 하며 온기가 사그라들고 있는 할머니 품에
엎드러져 갓난아기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한 편으론 이 믿을 수 없는 순간조차
다 내 생생한 악몽이길 수없이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