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승미 Oct 07. 2023

#11. 아가씨 아니고 간호사예요.

<간호사 살리기>




짧았지만 병동에서 근무했을 때에도,

응급실에서 근무했을 때에도 느꼈지만

간호사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들 중 하나가

바로 '아가씨'였다.





우리나라 정서 상

사람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에게

친근함의 표시로 이모, 언니, 누나, 오빠, 동생 등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곤 한다.



물론 이러한 호칭들이 매사 불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만큼은

이러한 호칭이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의사에게 아저씨, 총각,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간호사에게

아가씨,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수도 없이 들었고 수도 없이 보았다.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간호사'라는 단어 하나만이라도 좋으니

있는 그대로를 불러주면 좋겠는 마음이다.





어느 날, 평소처럼 응급실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접수를 했다.

같이 온 보호자는 그녀의 아버지였고,

얼굴빛이 붉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집에서 술을 한잔 걸치고 오신 것 같았다.  




응급실을 내원한 이유는 딸의 두드러기.

뭘 잘못 먹었는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왔다고 했다.




나는 Triage실에서 딸아이의

전반적인 상태를 확인했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응급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술에 취한 그녀의 아버지였다.

나를 대면한 순간부터



"아가씨, 아가씨!"




몇 번이고 아가씨라고 나를 불러대던 이 사람.

아가씨라는 소리가 불편하긴 했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아 애써 무시했다.




술이 취한 상태라 혹시나 사고를 일으키진 않을까

다소 걱정되긴 했었지만

그럼에도 딸 앞이니 조심하시지 않으려나 생각했다.





딸이 과장님의 진료를 받는 동안,

그 사람은 우리에게 다가와 궁금한 게 있다며

스테이션 앞에 서서 질문들을 마구 늘어놓았다.




술기운에 횡설수설하던 그의 말들을

정확히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대략적으로 종합해 보니,

다른 병원에서 타먹는 혈압약과 심장약이 있는데

진료는 안 보고 싶고 응급실에서 그 약들만

새로 타먹을 순 없냐는 내용이었다.





응급실에서 과장님의 진료를 보지 않고

단순히 약만 타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사유를 설명했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던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묻기 시작했고

우리 또한 반복해서 사유를 설명했으나

그는 급기야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흥분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아가씨'라는 호칭도 절대 빼먹지 않았다.





결국 참다 참다 폭발한 차지 선생님이

한 마디 내뱉었다.





"보호자분, 아가씨 없어요 여기.

저희 아가씨 아니고 간호사예요.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세요."





차지 선생님이 그 말을 한 순간

그의 얼굴이 더 빨개져서는

폭주기관차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뭐?!!!! 니 지금 뭐라 했어?!!!

간호사?!! 간호사가 아가씨지 뭐!!

웃기고 앉아있네!! "





약을 줄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이 거슬렸던 건지,

아니면 아가씨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지적이 거슬렸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불같이 화를 내는 보호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볼 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걱정대로 딸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아빠, 그만해."




하고 힘없이 말리고 있었고,

나는 한 차례 보호자를 말렸다.




"보호자분, 진정하시고.

따님분 진료받고 계시니까 진정 좀 하세요."




그러자 그는,




"진정?!! 내가 진정하게 생깄나?!!

참나, 그라믄 뭐, 니들 결혼이라도 했나?!!

아가씨를 아가씨라 카지

그럼 뭐 아줌마라 칼까?!! 뭘 그리 따져 싸!!"





진정하라는 내 권유에도

삿대질을 해가며 분노를 쏟아내던 보호자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빠, 그만 좀 해 제발!! 왜 이래 진짜!!

나 아프다고!! 아빠 싸우지 좀 말라고!! "




딸이 옆에 다가와 팔을 붙잡고 말려봐도

딸의 손길을 뿌리칠 뿐,

그의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가씨가 아니고 간호사라고,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한 게 그리 잘못이던가.




의사에게는 총각,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의사, 선생님이라고 호칭은 잘만 쓰는데

왜 우리는 간호사라는 호칭이 있음에도

아가씨라는 말을 들어야 하나.





그 사람이 피운 난동은

엄연히 진료를 방해하고 있었고,

결국 과장님까지 합세해서 보호자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보호자분, 따님도 앞에 있는데 말을 좀 가려하시죠.

자꾸 이러시면 응급실 진료방해입니다.

저희도 경찰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진료를 방해한 적이 없다며

부를거면 얼마든지 부르라며

배 째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뭐 경찰?!! 그래 씨발, 경찰이든 뭐든 다 불러라!!

내 안 도망갈 거니까 얼마든지 불러라!!!

염병하고 자빠졌네; 아가씨라 캤다고

새파랗게 어린년이 어데 싸가지 없게; "






 온갖 폭언을 퍼부어대는

그에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녹음기를 켜서 녹음하는 것과

*폴리스콜을 눌러 경찰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Police call : 응급의료기관 내에 설치된

경찰청 상황실과 연결되는 비상벨.

응급실에서 폭력상황 또는 진료방해 행위가 있을 경우

이를 누르면 경찰서로 자동 출동 요청이 가는 시스템)





경찰들이 오고 나서야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된 그는

한 마리의 온순한 양으로 돌변하더니

경찰들에게 수고하신다며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잠깐 흥분했던 것 같다며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순한 양이 돼버린 그의 모습만 보게 된 경찰들은

구태여 일을 만들지 말고 순조롭게 진행하자며

되려 우리를 타일렀다.




우리는 폭언을 당한 억울한 입장이라고

녹음을 들려주며 경찰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과정이 어찌 됐건 저 사람은 술에 취한 상태고

결과적으로 사과를 하니

그래도 받아주라는 경찰들의 말에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고

그는 딸과 함께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병원 밖에서 누군가는 우리를

아가씨, 언니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 간호사는 간호사다.

아가씨, 언니, 오빠도 아닌 간호사.




이게 뭐 별 거라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같은 의료진의 입장에서

우리도 우리의 호칭으로

당당히 불리고 싶다는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전 10화 #10. 코로나로 얼룩진 우리는 의료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