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모시고 간 지방의 장례식장이었다. 어른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그 옆에 서로 만만한 사람끼리 모여 "이 집이 육개장을 잘하네, 반찬이 깔끔하다, 수육이 야들하게 잘 삶아졌어." 하며 본격적인 식사를 했다.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신 장례식은 보통 비통함보다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고인과의 추억을 얘기하거나, 가족들의 애씀을 치하하는 분위기가 컸다. 같이 손잡고 꺼이꺼이 눈물을 쏟기보단 가벼운 어깨 토닥임이나 마주 잡은 손등을 쓰다듬는 정도랄까. 오랜만에 가족들 안부를 묻는다는 면에선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먼 친척들이 각 집을 대표해 모인다는 점. 그들에게 표면적인 안부를 묻는다는 점. 이를테면 "아이가 몇 살이라고 했지? 이제 초등학교 들어갔겠네. 다 키웠다, 다 키웠어." 같은. 또는 "왜 와이프는 안 오고 혼자 왔어. 아 출근했다고? 어디 회사 다닌댔지? 농협. 농협이면 안정적이고 좋지. 회사 잘 들어갔네, 돈도 잘 벌고." 또는 "이사 갔어? 어디로. 거기면 서울하고 교통도 가깝고, 최고지. 그 앞이 IC 아니야. 거기서 쭉 빠지면 서해안 고속도로고."와 같은 말들. 1, 2년이 흘러 또 다른 경조사에 만나 다시 물어볼 말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처음인 양 다시 반복될 말들.
종이 그릇들이 비어 가자 주변을 맴돌던 인사치레는 굳이 여기서 해야 할 말인가 하는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부모님 옆구리를 찌르던가, 발가락을 살짝 터치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도리질을 해야 할 듯한 말들이 오른쪽 상단에서 한 번, 왼쪽 하단에서 한 번, 오른쪽 하단에서 두 번, 왼쪽 상단에서 세 번 왔다 갔다 했다. 어지러운 말들에 잠시 눈을 감고 눈알을 굴려보다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대외적인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의 지나친 겸손으로 낯이 민망할 때는 나무젓가락으로 새우젓 속 새우를 집었다 놨다하며 애꿎은 낚시질을 했다. 이를 알아챈 상대방이 다시 아빠 어깨를 잡아 올려 단정하게 펴줄 때는 그의 허리가 좀 더 곧아지고, 하얀 비닐에 가까이 앉게 했다. 그 듣기 좋은 말은 사람 좋은 웃음을 만들더니 이내 엄마를 향해 몇 마디 덧붙였다.
이가 빠지고 있는 노모였다. 아흔 중반에 다다른 그녀가 지금껏 임플란트 없이 제 이를 갖고 음식을 씹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예순을 훌쩍 넘긴 아들보다 더 쌩쌩한 그녀가 하나둘 빠지는 치아에 걱정 근심 속 한숨 쉬는 날이 많아지자, 그는 아내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 치과 한번 모시고 가 봐. 안 가신다 해도 설득해서 모시고 가야지, 아무리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지만 그러다가 제대로 드시는 것도 없어 큰일 나."
엄마는 동조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지금 가을이지? 곧 낙엽이 지겠네."하고 묻고 대답하는 말들 같았다. 그 대화가 이상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아빠의 질문, 엄마의 대답. 남자의 노모를 며느리가 돌봐야 하며, 그것을 맏며느리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모습에 '왜 이제야 의문이 들었을까'하는 뒤늦은 뉘우침이 들었다. 할머니는 말 그대로 아빠의 엄마다. 하지만 자신의 엄마를 돌봐야 하는 일들, 이를테면 대학병원 검진을 예약해 늦지 않게 도착하고, 의사에게 할머니 증상을 대신 답변하는 말들은 오로지 엄마의 몫이었다. 타 온 약을 제시간에 맞게 챙겨드리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몸에 좋다는 모든 것을 넣은 주전자 물을 대령하는 것도 그녀였다. 점점 변을 보기 힘들어하는 할머니를 위해 매 식사에 미역줄기볶음을 대령하는 것도 그녀였다. 아침마다 요구르트에 키위, 바나나를 넣고 과일주스를 갈거나 오전 내내 드실 고구마나 떡을 적당히 데워 소파 앞에 가져다 두는 것도, 할머니의 며느리이자 아빠의 아내인 엄마의 할 일 중 하나였다.
아빠는 엄마가 하는 수많은 돌봄의 행위를 알까. 사람이 사람을 전적으로 돌보며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에 다정한 눈길을 건넨 적이 있을까. 할머니가 하는 감옥 창살 같은 말들이 엄마를 얼마나 족쇄는지 알긴 할까. 자신의 노모를 맡긴 그는 언제나 어디든 나갈 수 있지만,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울 때는 몇 주 전부터 대체자를 찾아 시간표를 조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궁금은 할까. 그 대체자는 대부분 아직 출가하지 않은 내 여동생이었고, 가끔 주변에 있는 내 언니나 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곳에 남자는 없었다.
여성에서 여성으로 전해지는 가족 돌봄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예의 없는,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떼놓을 생각이 없는 '자기만 잘났다' 생각하는 인간. 어른에 대한 효를 상실한 인간 말종. 돌봄의 무게가 짙어질수록 집에 메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돌보고 발전해야 할 힘은 바닥나고 말았다. 누군가를 케어하면서 자신을 발전시키기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 지난한 시간 감옥에 갇혀보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말해선 안 됐다. 그저 노인 곁에 앉아 숨 쉬는 것 말고는 어디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은 곧 같은 공기에 숨 막혀 나가떨어지는 일이었다. 돌봄이란 그런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숨통이 막혀오는. 평온한 공기 속에 지루한 독이 스멀스멀 퍼져나가 모두에게서 생기를 뺏어가는. 일종의 질식 상태가 되기 전에 틈을 허용해 그곳의 환기를 해야 하지만 과연, 그 문틈은 누가 열 것인가. 감당하려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곳에 남성이 존재한다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아직도 여전히, 그곳에 남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