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여유에서 나왔다. 금전적인 여유든 심리적인 여유든. 하여 남편의 출장은 나의 다정함을 한 겹 벗겨내는 일을 했다.
비행기 편명을 검색했다. 착륙했다는 정보가 뜨자, 남편이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가 문을 열면, 그래서 우리 집 현관문 상단의 풍경이 울려 퍼지면 그가 몰고 온 바람 냄새에 숨을 쉴 듯했다. 혼자만의 책임감을 벗어나서 이젠 너의 차례라는 암묵적인 미소로 방에 들어갈 모습을 떠올렸다. 면 커버를 씌운 침대에 허벅지를 문지르며 베갯속으로 양손을 집어넣고 얼굴을 비빈다.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냉기를 다리 사이에 끼고 눈을 감는다. 거실의 소란스러움은 조금씩 볼륨을 낮추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발끝까지 도달한 행복을 잠시 미룬 뒤 문자를 보냈다.
"도착했어?"
게이트를 통과한 그를 생각했다.
"응. 이제 막 내렸어."
그의 대답에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모습, 입국 심사를 거치는 모습, 같이 간 동료들과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공항리무진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순차적으로 그려졌다.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문자를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비 오는 공항이라 정신없겠다. 피곤했을 텐데 버스 안에서 잠들었나. 30분 후면 도착이라는 문자를 적는 그를 상상하며 외식 메뉴를 찾아봤다. 예약을 할까. 쌓인 문제집을 채점하며 혹시 놓치는 연락이 있을까 핸드폰을 힐끗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활주로를 벗어난 답장에 채점 색연필은 책상을 또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이사님이랑 커피 한잔 하고 이제 버스 타러 가."
시계를 봤다. 혼자 약속한 외식이 더 이상 가능치 않음을 깨닫자, 마음의 여유가 바닥났다. 밑바닥을 간신히 채웠던 잔량이 부글부글 들끓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버스를 타지 않았다. 출발하지도 않았다. 버스 안에서 졸고 있는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장을 보러 나섰다. 외식은 가능치 않았고 이미 밥때가 지났다. 유난히 냉기가 가득한 냉장고에 서둘러야 했다. 겨드랑이에 지갑을 끼고 한 손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다른 한 손엔 우산을 들고나왔다. 귀와 어깨 사이에 우산대를 끼고 쓰레기통에 스티커를 태그하는데 우산이 휘청거렸다. 그 작은 반동에 샛노란 비닐 한가득 섞인 음식물이 내 가슴팍에 휘이 들어왔다. 한쪽 어깨는 빗물로 점점 진하게 적셔졌고, 음식물은 꿀렁이는 국물을 토할듯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속에서 양복 입은 그가 소환된 건 내 모자란 인내심 때문일까.
남편이 출장 캐리어를 끌고 원두 향이 가득한 카페에 들어간다. 경력이 점철된 서류 가방을 캐리어 위에 세우고 슈트 안감에서 지갑을 꺼낸다. 테이블에는 석 잔의 아메리카노, 세 개의 서류 뭉치, 세 개의 꼬아진 다리가 있다. 월요일에 보고할 경제학적 용어가 카페의 소란스러움에 한몫한다. 이를테면 생산량, 비용 절감, 이익률 같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혹여 쓰레기 국물이 슬리퍼에 떨어지지는 않았나, 앞 코를 살핀다. 서두르던 발걸음은 점차 둔해지더니 이내 멈추고 말았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
우리 현실이 극명하게 대비돼서.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버리자마자 종량제봉투를 들고 선 모습이 썩 유쾌하지 못해서. 꾸역꾸역 담긴 것이 식료품인지, 머릿속을 뒤흔드는 생각인지, 그럼에도 있어야 할 곳의 무게인지 알 수 없어서.
내리는 비처럼 모든 것이 추적거렸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있지만 전혀 달랐다. 누구 탓도 아니지만, 그래서 누구도 원망할 수 없지만, 우리가 같은 가족 돌봄 제공자인지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남편이 막중한 책임감으로 급여 노동자의 삶을 쳇바퀴 굴러가듯 생활하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결국 나는 나인지라, 나 자신의 안쓰러움이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을까.'
내 노동력은 얼마일까. 가정으로 돌려보내진 노동자를 어제와 같은 생산성을 회복해 돌려보낸 내 재생산율은 몇 퍼센트일까.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돌보고 생산해 내는 나의 돌봄 가치는 얼마로 산정할 수 있을까.
결국 국가가 필요한 건 가정으로 돌아가 재생산돼 내일도 차질 없을,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착실한 노동자 아닌가. 국가라는 거대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위해 영원히 닳지 않는 작은 톱니가 된 노동자 말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100퍼센트 충전될 집을 돌보는 이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 포함되는 것일까 아님, GDP에 포함되지 않는 하찮은 노동일까. 과연 국가는 보이지 않는 가슴의 노동에도 가치를 부여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해내는 모든 돌봄의 노동에 자꾸만 의문이 든다. 나의 노동이 그의 노동과 같은 값어치를 하고 있는지. 단지 너와 내 생각을 넘어 사회에서도 진정으로 가치를 부여 하는지. 수많은 말들이 가슴 뚫린 빈 마음으로 행해지는 건 아닌지.
노동자는 잠을 자고 어제와 같은 컨디션으로 돈을 벌러 나간다는 의기양양함을 얹고 집 밖을 나가면 되지만, 수많은 돌봄의 원 속에 갇힌 사람은 마음이 헛헛해져 자신의 자리를 잃어갈 수도 있다. 허무주의가 강하게 쏟아져 내려 '내가 나로서 있기'가 불가능해 질때면, 자꾸만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할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있기가 가능해지려면 결국 사회의 시선 또한 나와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함께해야 할 텐데 그 격차에 괴리감이 생겨 나는 오늘도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나도 자본주의 사회의 테두리 안쪽에 속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