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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지는 잘못이 없지

by 스미다

"엄마, 이따 계란말이 젓는 거 내가 해도 돼?"

"칼로 자르고 싶은데, 괜찮아?"

"이건 어떻게 만들어? 뭐뭐 들어가는 거야?"


부엌에서 분주하게 조리 도구가 펼쳐질 때면 아이들은 문제집을 들고 와 옆에 서서 물을 때가 많다. 분명 공부는 하기 싫고, 배는 허기지니 방앗간 들리듯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궁금한 것을 재잘재잘 쏟아놓는 것 일테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얼른 할 일이나 했으면 싶어 귀찮을 때도 많은데, 가끔은 '이런 건 좀 묻지 말고 궁금해하지 말지.'하는 묘한 감정이 일렁일 때가 있다. 꼭 어린 시절 나 같아서, 그래서 내가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닐까 싶은 자조 섞인 물음이 들어서, 그저 부엌 저 멀리 떨어진 책상에서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기를 바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엄마, 오이지에 뭐 들어가? 매실청도 넣어? 깨소금이랑, 고춧가루 넣고. 간은 소금으로 해?"


대가족 살림을 하는 엄마는 지박령이라도 내린 듯 부엌을 떠날 수 없었다. 삼시세끼만 차려도 힘들다, 힘들다 곡소리가 난무하는 요즘 시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매번 많은 밥을 지어야만 했다. 집 앞 밭에서 상추를 뜯고, 오이를 따고, 대파 한뿌리 쑥 뽑아서 흙을 툭툭 털고 끼니마다 재료 손질을 했던 엄마 옆에서 난 참으로 궁금한 게 많은 딸이었다. 그럴 때 엄마는 "뭐 이런 걸 궁금해하냐." 하면서도 칼질 틈틈이 다진 마늘 약간, 소금 살짝 이런 얘기를 하며 간을 맞췄다.


귀동냥으로 들은 게 있어서 그런지 일찍부터 부엌에서 한 도마 차지하고 채를 썰었다. "잡채 거리다."하고 채소 바구니를 앞에 주면, 당근 양파를 고르게 채를 썰고, 파프리카를 위아래 잘라내고 씨를 도려내 같은 길이로 썰어내는 식이였다. 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많이 먹어본 음식일수록 모양을 상상하기 쉬웠고, 그저 손에 잡히는 것 먼저 쉽게 '클리어' 하면 되는 식이었다.

"탕국에 들어갈 거야."라고 하면 무를 나박나박 썰면 되고, 굴비가 한 상자 들어오면 신문지를 펼치고 가위로 지느러미를 잘라내 숟가락으로 비늘을 쓱쓱 긁으면 됐다. 동네 어르신들이 소를 한 마리 잡은 날이면 파란 비닐봉지에 담긴 뭉툭한 소고기를 부위별로 나누어 기름기를 떼고 작은 비닐에 담아 '언니네, 국거리용', '엄마네, 구이용'이란 글씨를 스무 번쯤 반복하면 됐었다. 그거면 됐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난 모두가 그렇게 크는 줄 알았다. 부엌 바닥에 자리 펴고 앉아 무심하게 쓱쓱 할당된 일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지금 와 보니 고기는 정육점에서, 채소는 밭이 아니라 채소 가게서 사는 일이었다. 쌀은 농사짓는 게 아니라 사 먹는 일이었으며 김장은 몇십 포기로 세는 것이란걸 이제야 알았다. 우리 집은 당연히 몇백 포기에 해당하는 김장을 했었고, 이마저도 "엄마, 이번엔 몇 포기야?"라고 물으면 "뭘 그런걸 세. 나도 몰라. 밭에 있는 거 다 하는 거지."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집이 어린이들 세네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고무 대야에 김치 속을 섞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산 세상은 동굴 속 벽화 그린 때나 움막 짓고 불 피우던 시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세상과 동떨어져 있고, 다른 말로 조금 무식하게 음식을 대하는 집 같았다. 썩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본가에서 자란 생활은 손끝에 물들어서 지금도 곧잘 집밥을 해 먹고 있다. '자고로 음식은 집에서 하는 것이지'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기저에 깔린 까닭에 하기 싫지만 뭐 그리 죽을 만큼은 아닌, '생일이니 간단히 미역국 끓이고 전복 사서 손질하고, 생선이나 갈비 좀 굽고 잡채나 하지.' 하는 시건방을 쉽게 떨 줄 아는 몸이 되었다. 한데 이런 내 모습을 곁눈질하며 자라는 아이를 보자니 나와 같은 삶을 살 것만 같아 할 수 있는 것도 일찍 시키고 싶지 않은 모순된 마음이 들었다.


굳이 이런 건 미리 알아서 뭐 하게.

그냥 너 먹고 싶은 건 나중에 사다 먹으면 되지.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들면서 아이의 궁금증에 굳이 대답해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인 게다. 자꾸 내가 오이지 만드는 걸 궁금해해서 지금 부엌을 떠나질 못하나 싶고, 할당된 집안일을 쉽게 쓱쓱 해낼 시간에 다른 궁금증을 갖고 새로운 세상을 봤으면 다른 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장독대 깊이만큼 땅을 파는 것이다. 모든 일이 결과론적으로 짜맞추는 행색일 테지만 가끔은 정말 '오이지의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닌지 홀로 작은 소리로 궁시렁궁시렁 읊조리게 된다. 오이지가 잘못은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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