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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Feb 21. 2024

청년의 구원.

    부모는 안전기지일까, 방패막이일까.

    내 아이의 정서적, 경제적, 물리적 독립을 위해 부모가 취해야 할 노선은 무엇일까. 새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자식을 위한 것일까. 노년의 부모를 넘어서는 신체를 가진 자식은 오늘도 부모를 앞세워 그 뒤로 숨고 만다. 노쇠한 그들의 몸집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안쓰러운 부모는 오늘도 답답함을 삼켜내고 방패막이가 되어 안전기지가 되어 준다. 자식이 몇 살이 됐던, 구부러진 허리는 상관없이 오늘도 그렇게 자식을 둔 죄로 방패막이가 되는 삶. 과연 그것을 과보호라 말할 수 있을까.




    아직도 부모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20~30대 청년들이 많다. 그들의 부모는 50~60대의 나이로 베이비부머 1,2세대들이 되겠다. 우리나라는 그들의 헌신과 노력, 눈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그 자식들은 넘실거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때론 죽음을 생각하곤 한다. 청년 자살률,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요즘 것들의 나약한 정신을 먼저 말해야 할까, 아니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팍팍한 삶을 먼저 얘기해야 할까. 누가 그들의 등을 밀어 한강을 대면하게 했을까. 형체 없는 그것은 때론 청년들의 몸을 조여 방문조차 열 수 없는 심리적 압박을 전하고 있다. 그들이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것도, 주식과 코인, 한탕을 위해 불법도박에 기웃거리는 것도 단지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 구조가 병들어 가고 있단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우울증은 서서히 번져가는 곰팡이와 같다. 곰팡이가 피기까지 정신과 신체는 서서히 생기를 잃고, 우울함에 잠식된다. 그러곤 이내 생각의 사고체계가 멈춰버린다. 옳은 선택이 가능한 사고의 틈새로 쿰쿰하고 푸르뎅뎅한 곰팡이가 번식된다. 그들의 생각을 조여오고 마비시키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더니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좀비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에게 연애와 결혼, 출산은 특권자들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정신을 방구석으로 밀어 넣고 어떤 식으로든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방 밖으로 푸른곰팡이의 어스름한 시간이 되자, 오늘도 지나버렸다는 탄식에 안도감이 섞여 음울하게 흘러가 버린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의지와 활력은 어떻게 불어넣어 줘야 할까. 그들이 필요한 건 할 수 있다는 응원일까, 세대의 공감일까, 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부모의 재력일까.

© unsplash


    초등학생의 불법도박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쥐어 진 세대는 그 안의 탐닉을 지나치지 못한다. 아니 피할 수 없다. 교묘히 그들의 사고를 유혹하고 점령하고 잠식하는 어른들의 악랄한 마음에 동심이 자랄 초록빛 세상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잿빛 세상에 빠져든 아이들은 이내 도움의 손길을 내밀다 덩달아 주변 친구들의 손목을 낚아채고 만다. 친구의 발버둥을 모른척할 수 없는 그리고 호기심을 짓누를 수 없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깊게 빠져들어 헤어 나올 수 없다. 단지 또 다른 친구에게 갈고리 손을 뻗는 것밖에는.

     세상의 암울한 이야기들을 전해 들을수록 외면할 수 없다. 먼저는 어린 세대의 나약한 정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은 모두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다르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의 판이 휘어져 넘실거리고 환락의 증세를 보이는데, 멀쩡한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닐까. 암흑의 갈고리를 피해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마이너스 통장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삶을 지키는 것이 되어 버렸다.


    

     흰 눈이 소복이 내린다. 누군가는 아늑한 실내에서 눈을 보고, 누군가는 밖으로 나가 눈싸움을 할 것이다. 눈길을 치우는 사람도, 우산을 쓰는 사람도 있겠지. 우리는 소란스러움 속 소외된 누군가를 바라봐야 한다.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맞으며 온몸이 젖고 있는 줄도 모를 누군가. 서서히 옷을 적시고, 체온을 떨어트리고, 손발을 얼어붙게 만들어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눈을 맞고 있을 연인, 가족, 이웃.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눈을 멈출 수는 없지만, 함께 눈을 맞으며 포근한 담요를 건네줄 수 있어야겠다. 그들의 마음을 고립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일, 우리가 필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모두의 자식을 위해, 형제를 위해,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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