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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06. 2024

우리의 거리를 단어로 설명한다면.

나는 이제 쟤 포기했어, 그리고 바라는 것도 없어.
어쩌겠냐, 내 업보지. 내 인생도 포기했어.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 해줄 말이 없었다. 몇 분째 서있던 발은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쳐진 추처럼 다리 한쪽이 기울어졌고, 마음도 갈 길을 잃어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그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엄마 편에 붙어있는 아이는 점점 아빠 쪽에 붙어 줄다리기하다 이내 심판의 역할을 하려 했다. 아무도 결판을 내달라 하지 않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등 떠밀려 씌워진 감투처럼 그저 집안의 이야기 속에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훈풍이 불어온다는' 글을 썼다. 분명 환기가 되고 있다고.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훈풍이 불어와 따뜻한 봄날을, 조금은 상쾌한 바람을 기대했건만, 그것은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 같은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채 그저 사막에 발자국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자취를 없앴고,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채 각자의 방향으로 걷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비유를 덧붙이자면 한증막 같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를 집어넣고 한증막의 온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싸움을 하듯, 모래시계를 주시하며 버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에 작은 탈출구를 흘깃거리지만, 도로 잦은 숨만 헐떡일 뿐이었다.


© unsplash

   

     86년생, 그 여자는 58년 개띠의 남자와 제일 닮았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은 그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아빠 성격을 똑 닮았다며 혀를 쯧쯧 차기도 했으니깐. 닮고 싶지 않아도 집안에 보이는 거울이 그것뿐이라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겠지. 그리고 자식 중 유일하게 부모 역할을 하는 그녀이기에, 부모로서의 짐을 조금씩 알게 된 것뿐이랴. 직책에 따르는 어려움, 그 책임의 무게를 말이다. 그녀 역시 하루하루 발버둥 침의 연속이다. 부모의 책임이 이렇게 막중할 줄이야, 세월이 갈수록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좋은 이정표가 되는 삶은 고된 선택의 연속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 아빠와 얽힌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바닥에 엎드린 채 회사 업무를 보고 있던 아빠 곁에서 같이 놀고 싶었으리라. 남자 역시 둘째 딸의 재롱이 퍽 귀엽기도 하여 간간이 눈을 맞추며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 어디서 얻었을지 모를 가위가 그녀 손에 쥐어졌고, '하지 말라'는 그의 말을 '조금 더 해봐라'라는 해석의 오류를 범하며 등을 팔짝팔짝 넘어 다녔다. 당연히 손에 있던 가위는 아찔하듯 아슬하게 그의 등 옆으로 떨어졌고, 불같은 호통이 밀려왔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늦은 저녁, 새로 산 꼬까옷을 입고 집 안에서 놀고 있었다. 아마 쟁취한 때때옷을 빨리 입어보고 싶었을게고, 아비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집에 들어온 그의 입에선 산발한 아이 머리를 향해 귀신 머리 같다는 뉘앙스의 어떤 욕설이 날아 꽂혔다. 당연히 그는 기억 못 할, 나에게만 또렷이 박힌 어느 유리 조각 같은 일이리라. 어린 시절, 수많은 다정함의 사진을 뒤로 한 채, 마음을 베어버린 이 두 조각이 그와 내 사이에 여전히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 unsplash


    그의 책임감이라는 우산 아래 이 정도 일화쯤이야 지우개로 지워줄 법도 한 일이다. 이런 일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고 뭐 소중한 상처 조각인 양 자꾸 꺼내보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픈 줄 알면서도 자꾸 손가락의 거스름을 떼고, 딱지를 뜯어 새빨간 피를 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자꾸만 생채기를 건드려 두 눈으로 목도하고 싶고, 그가 내준 상처에 깊은 골을 파고만 싶다.




    다시 그의 앞에 서 있는다.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두 무릎에 손을 얹은 그의 모습을. 며칠 전보다 뱃살이 빠진 듯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작정하면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다. 한숨을 푹푹 쉬며, 자신의 두꺼운 손가락만 바라보는 그의 정수리가 유난히도 시려 보이면서 자꾸만 어린 시절의 생채기가 떠오른다. 이게 우리의 적당한 거리일까. 부모와 자식 간의 '의무적인 도리'를 할 수 있는 '유교적 거리'일까 잠시 생각해 본다. 어렸을 적 아빠와 다정히 반말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흡사 현대 가족의 표본 같기도 하고, 드라마 속 단란한 부녀 같기도 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펼치던 아빠에게 짧은 종결어미를 툭툭 건네봤다. 뭐 대충, 그림이 나오지 않는가. 몇 번의 반말을 참던 그는, 존댓말을 쓰라며 엄격한 시선을 다시 신문으로 옮겼다.

    이게 우리의 거리다. 절대 좁혀질 수 없는 흑백티비와 컬러티비의 거리. 우리 사이 다소 지지직 거리는 음향은 이제 배경음이 되었다. 평온한 호수의 파동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잠시 지지직거리는 그 거슬리는 시간을 버텨야겠다. 누가 한증막을 먼저 도망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모래시계를 엎고 땀에 젖은 시야로 멍하니, 때론 악으로 주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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