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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13. 2024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연재 북을 쓰면서 가족 구성원에 대해 미뤄뒀던 생각의 짐을 꺼냈다.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이해되지 않았던 꾸러미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시간이 되고 있다. 글을 연재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나 또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의 행동만, 관계만,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회, 한 회 거듭할수록 나란 인간의 무례함이 슬슬 몰려왔다. 난 과연 이 끈적임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학생 신분으로써 내 무례함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학창 시절, 으레 학생이라는 신분에 맞게 열심히 공부했어야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꽤, 열심히 했다. 밤새 시험공부를 하기도 하고, 두 자릿수이긴 하지만 전교 석차에도 들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내 점수를 궁금해한 걸 보면, 그래도 좀 봐줄 만했나보다. 중학교 2학년, 시골의 본가로 이사를 오며 전학 온 학교는 일진들이 있는, 다소 노는 분위기였다. 운 좋게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나오는 성적에 만족하며 여느 열다섯 살과 다름없는 시절을 보냈다. 더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하기보단, 적당히 안정적인 곳으로 가서 고등학생의 풋풋한 청춘 생활을 즐겼다.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고3 7월, 숨 막히게 날카로운 여름 공기와 함께였고, 간신히 수도권의 시립대학교를 문 닫고 들어갔으며, 자기 주도 공부는 스무 살 대학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졸음을 몰며 미싱을 박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원서를 독해하고 고독하게 공부했다. 과 탑을 놓치지 않았고 58년 그에게 당당히 성적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등록금이 지원되니 토익 점수에 신경 쓰라는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왔다. 노력의 보상인 장학금은 마른 나뭇잎 굴러가듯 누군가의 지갑으로 들어갔고, 내겐 58년 남자의 무덤덤한 빈껍데기 같은 시선만 남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학생으로 공부에 대한 의무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부모의 지원으로 과외를 받았지만, 목적 없이 공부했다. 아니, 시간 보내기에 급급했다. 부모의 돈이 내 머리로 들어가지 않고, 과외선생님 용돈으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사실을 뉘우친 건 바로 수능 전날 오후였다. 교실 짐을 차에 옮겨 놓느라 58년, 그를 만났다. 트렁크에 짐을 실은 그는 회사 이름이 적힌 하얀 봉투를 건넸다. 들어가 봐라, 간단한 말과 함께 뒤돌아선 그를 멋쩍게 바라보다 조용히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서툰 자판 실력으로 써 내려간 더 서툰 마음이 들어 있었다. 곳곳에 맞춤법이 틀려 있었지만, 강조하고 싶은 문구에는 정성 들여 밑줄을 쳐 놓은 모습이 강 과장, 딱 그였다. 담담히 읽어내려 오며 맺히던 슬픈 뜨거움은 무참히 떨어졌고, 지난 나의 노골적인 배신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주저앉고 싶었다. 

    수험생으로서 그의 믿음을 배신한 내 무례함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내일이 되면, 그가 느낄 실망감을 무엇으로 보상해야 할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충실히 공부했을까. 하다 하다, 왜 이 편지를 진작에 주지 않았나, 하며 또다시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가족의 믿음을 져버린다는 것, 그것만큼 무례한 일이 있을까.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유일한 존재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 실망할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가 느낄 공허함은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편지와 함께 처참한 기분만 들었었다.



    

    결혼과 출산.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사회적 payback time이었다. 집안의 첫 결혼이었지만, 최소한의 준비로 결혼식을 올렸다. 부모님 도움으로 꾸미게 될 신혼집은 회사 보고서를 방불케 할 만큼 각 장단점을 비교 분석해 상의했다. 돈이 쓰일 출처를 그들도 합당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소한의 금액일지라도. 

    출산 역시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힘들었다. 물론, 부부도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원했지만, 조부모가 되는 삶을 당연히 생각하는 그들의 고리타분한 기대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몇 달 안에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이것이 결혼한 내가 할 수 있는 사회적 보상의 단계라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보면, 용돈을 제때 드리는 것보다 손주의 웃음이 효도구나, 하는 순간들이 있다. 물론 부부에게 선물로 다가온 아이지만, 자식의 책무를 완수했다는 감정의 편린 역시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끈적임은 별반 다르지 않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이것은 가장의 몫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도 없지만 자리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위용을 애써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부재를 생각해 본다. 자리에 빈껍데기만 남았을 때 우리는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장판에 지져진 담뱃불 자국 같은 그의 생채기를 그제야 발견할 수 있을까. 

나의 무례함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심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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