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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20. 2024

아흔 넘은 노견의 하루.

    이미 푹 꺼지고 갉아진 낡은 소파에 묵직한 엉덩이의 무게를 추가한다. 한평생 그녀의 자리는 세월을 견디다 못해 수명을 다했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흔을 넘긴 노견은 오늘도 자기 냄새를 풍기며 휴지 조각을 고이 접어 테이블 위에 둔다. 그 옆에는 각종 약 꾸러미와 영양제가 약국 못지않게 즐비해 있고, 변비에 좋다는 요플레와 바나나, 두유가 항시 준비되어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거실로 나와 약 꾸러미를 응시한다. 서둘러 뜯었다가는 약이 도망을 가기에 조심히, 아주 비밀스럽게 봉지를 뜯어 한 손에 넣고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수를 확인하면 물과 함께 천천히 삼키며 몸 안의 변을 밀어내려 애쓴다. 하루라도 변을 보지 않으면 조급증이 몰려오기에 정성을 다해 한 알, 한 알 삼켜본다. 늙은 대장의 역할을 위해 성스럽게.




    아들 내외가 모시며 사는 이 집은 나의 피와 땀으로 일군 재산이다. 배를 곯고, 시집살이를 견디며 잡초 하나하나 정성 들여 뽑아가며 일군 내 삶, 내 모든 것. 그곳에서 한평생 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데 자식들도 근거리에 살며 나를 돌아보니 이만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큰 아들놈은 안쓰럽지만, 장남의 무게가 그런 것을 어쩌랴.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도왔고, 알아서 공부하더니 공기업에 들어가 정년을 마쳤다. 둘째 딸은 시집만 잘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남편이라고 옆에 붙어있나 싶다가도 어쩌겠냐. 이혼이 수두룩하다지만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가 쳐박히기 전에 절대 꿈도 못 꾼다. 우리 막내아들은 학교 체육 선생님으로 부모의 자랑이다. 그 어렵다는 선생님 자리를 들어가 평생 교직자의 생활을 견딘 우리 막내. 덩치는 거구지만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말도 예쁘게 하는 사랑스러운 막내다.

© unsplash


    큰 며느리는 이제 없으면 내 하루가 불안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멈아" 하고 부를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한 시간씩 옆집 아줌마들 만나러 나가면 아주 좌불안석이다. 이것이 시엄니 내버려두고 흉을 보러 나갔나, 뭣들 하느라 여태 안 들어오는지, 냅다 소리 지르고 싶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니 그냥 참고 있는 것이다. 나간 지 10분, 20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다. 안 되겠다. 이따 들어오기만 해봐라, 시어머니 무서운 줄 모르고 돌아다니지, 한 소리 해야겠다. 내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걱정거리다. 점심 먹고 나간 첫째 아들은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안 들어온다. 차를 갖고 나갔는데, 어디 사고라도 난건 아닐까, 아범한테 전화 좀 해봐라 해도 들은 체도 안 한다. 어련히 들어오겠느냐니. 네 아들이 점심에 나가서 저녁까지 안 들어와 봐라, 걱정이 안 되나! 저것이 늙어봐야 내 마음을 알지, 지 자식들 옆에 끼고 사니 내 마음을 모른다 몰라. 둘째 며느리는 여우처럼 살살거리다가도 뭣하나 틀어지면 쏘아붙여 대니 뭘 말할 수도 없고. 딸내미는 지금까지 밥 장사하느라 고생하는 게 여간 마음이 좋지 않다. 남편 복 없으니 지지리 고생이지, 휴. 내가 저것 때문에 편히 눈 감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나마 요즘 내 낙은 증손주들이다. 요것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해야 집안이 사람 사는 곳 같다. 종알거리며 미주알고주알 거리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만, 옆에 앉아 티비라도 보고 있으면, 고사리손을 한 번씩 만져본다. 옷도 얼마나 조그만지, 벗어놓은 외투를 손다리미로 고이 접어 한쪽에 놓는다. 내 자식도 이럴 때가 있었지...... 지나온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밖에 나가서 풀이라도 좀 뜯어야겠다. 비닐하우스에 시금치 사이로 난 잡초를 뽑다가 고개를 드니 노인정이 보인다.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지만, 10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로 발길을 뚝 끊었다. 말은 아니라지만 내 나가면 과부 왔다며 눈초리 보낼 게 분명하다. 남편 없는 여편네는 기 못 펴고 사는 거다. 노망난 할미들 입에 내 흉을 뭣 하러 올리나, 그놈의 화투 안 치면 그만이다. 내 나가나 봐라!

    하루가 다르게 몸이 늙는 게 느껴진다. 입버릇처럼, 그만 죽어야 네가 고생 안 할 텐데.. 해봤자, 죽음이 두렵긴 마찬가지다. 받아들여야지 하다가도 꿈에 검은 자락만 보여도 날 데려갈까 덜컥 겁이 나서 오줌이 저린다. 먼저 간 영감한텐 미안하지만, 아직 이승에 발붙이고 싶은 걸 어쩌랴. 미안하지만 영감, 나 좀만 더 있다가야겠다. 몸이 안 좋을 때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살려고 곡기를 놓치지 않는다. 꼭꼭 야무지게 씹어 넘기고, 아픈 게 더 싫어 양치질도 열심히 한다. 임플란트 한두 개 한 것도 얼마나 아팠는지,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다 살아났다. 이승에 정이 남은 만큼, 죽음이 내 앞에 오지 못하도록 오늘도 야무지게 약을 털어 넣고, 애미에게 먹고 싶은 음식도 부탁한다. 영양제가 떨어져 가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른 변비약도 사 오라 해야겠다. 이렇게 조금만 더 살면 안 될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조금만 더 욕심 내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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