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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소예 May 20. 2022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창작 기록 - 키워드로 이야기 만들기


키워드 : 아파트, 라디오, 꿈, 봄, 경비아저씨, 밤 10시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  

코로나는 드디어 종식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00 아파트에서는 3년 만에 야시장을 크게 열고,  

아파트 입주민이 참여하는 ‘복면가왕 노래대회’를 한다.


그 무대가 궁금한 인근 주민들도 퇴근길을 재촉해서  

야시장 천막 식당에 한 자리씩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어른들은 바비큐를 먹고 동동주를 마시며 각설이 무대를 구경하고,  

아이들은 미니 바이킹을 타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노래대회에서 복면을 쓰는 룰을 정한 것은 부녀회장의 아이디어다.  

고약하기로 소문난 부녀회장이지만 아이디어가 좋은 편인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해야 노래를 못해도 많이 지원할 것이라는 이유로  

복면 대회를 하자고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코로나로 마스크에 길들여진 몇 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참가자 입장에서도 부담 없이 노래할 수 있어서 꽤 괜찮은 아이디어다.  

단, 1등은 파격적인 상품을 받는 만큼 시상자 발표가 있는 밤 10시에

얼굴을 공개하고 수상소감을 듣기로 했다.  


1등의 상품은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이다.  

1등을 뽑는 방식은 인기투표 방식으로  

야시장에서 2만 원 이상 구매한 영수증이 있으면 투표권이 주어진다.  

설사, 음치라고 하더라도 많은 득표수를 획득하면 1등을 할 수 있다.  


투표에 참여한 입주민이나 인근 주민에게는 사은품을 받을 수 있는

행운권의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에 많은 참여가 예상된다.


드디어, 대망의 노래대회가 시작되었다.  

부녀회장의 기똥찬 아이디어로 이곳이 ‘너목보’(너의 목소리가 보여)

촬영 현장인 듯 음치들의 향연이 시작된다.  

인근 주민들의 얼굴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면 뭐해!  

 전국의 음치들이 다 모였구먼! 하하하!”


사람들은 더 이상 노래는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음식과 수다에만 몰두한다.  


한참 참가자들의 핏대 세우는 열창무대가 진행되고,  

이번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마이크를 잡고 서 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적은 머리숱과 희끗희끗한 머릿결,  

앙상한 다리가 세월을 말해준다. 술 취한 취객은 난동을 부린다.


“트로트 그만 불러!”


노래 반주가 시작되고, 차분한 음성이 아파트에 울려 퍼진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세상 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욕심 많은 사람들 얼굴 찌푸린 사람들 마치 그림처럼 행복하면 좋겠어.


 


‘빗방울 떨어지는..’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벚꽃비가 천막 위로 후드득 떨어진다.  


야시장의 모든 사람들을 단번에 무대 위로 집중시킨 가왕의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가왕의 번호를 잊어버리기 전에 투표를 하려고  

사람들은 급하게 투표함에 모여든다.


밤 10시.  

1등 시상자 발표시간.  


사회자는 호명한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부르신 김 00 씨.


사람들은 그 대단한 가수가 몇 동, 몇 호에 사는 주민인지 궁금하다.  

호명을 해도 나오지 않자 부녀회장이 참가자 목록을 뒤적인다.  


“101동 504호, 김 00 씨. 어디 계세요?”  

마이크를 빼앗아 들고 부녀회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이윽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고개를 푹 숙인 김 00 씨가 등장한다.  

그리고 복면을 벗는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부녀회장이 놀란 눈이 되어 소리를 지른다.

“경비원 김 씨! 아니에요? 아니, 입주민도 아닌데 대회는 왜 나왔어요?”


그러자 다급하게 마이크를 뺏어 든 경비아저씨가 얘기한다.

 

“입주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될지 몰랐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꿈이 가수였어요.  

그래서 노래 딱 한 곡만! 부르고 싶다고 했더니, 504호 어르신께서  

‘우리 집 주소 쓰고 나가서 노래 한 곡 부르고 들어와라!’고 허락해주셔서..

안 되는 줄 알면서 신청했습니다..

 

어차피 복면도 쓰고, 요즘 젊은 분들은 노래도 잘하니까,

아무도 저한테 신경을 안 쓰겠다 싶어서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축제를 망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상금 필요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세요.”


부녀회장의 화난 눈, 당황하는 사회자, 연신 굽신 굽신하는 경비아저씨.

야시장이 정적으로 휩싸이고 있을 때 504호, 90세 어르신께서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나오신다.


 

“이 보시오들! 입주민이 별거요? 새벽부터 밤까지 우리 아파트 지키면서 가장 험한 일 하는 사람이 누구요?

아침부터 일하러 갔다가 밤에 와서 잠만 자는 젊은이들이 옆집에 이런 늙은이가 사는지 알기나 하오?

잠깐이라도 매일 같이 들려서 말 한 번 건네주는 김 씨 같은 사람이 나한테는 제일 좋은 이웃이고,

훌륭한 입주민이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소리.  

“옳소. 옳소”, “1등 시상해라.” “노래 최고다!”, “앙코르”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1등 시상식이 이어지고,  

경비아저씨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울고 계셨다.


중고등학생들은 연신 영상을 찍어서 너튜브와 인별 그램, SNS에 올리느라 손이 분주하다.


‘00 아파트 복면가왕 경비아저씨’의 노래 영상과 시상식 영상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00 아파트의 이미지도 좋아져서 연일 기삿거리가 되어 화제다.  

이제는 부녀회장의 적극적인 도움 아래, 경비아저씨는 가끔 방송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라디오 녹화가 있는 날. 경비아저씨는 라이브로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열창하고,

방송에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입주민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DJ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경비아저씨 :


코로나로 그동안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차별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 종일 무거운 물건을 들고 다니는 택배기사님도, 운전하느라 힘드신 운전기사님도,  

지저분한 곳만 찾아다녀야 하는 환경 미화원분들도,

저 같은 60대 중반의 경비원 같은 사람들도 모두가 차별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30년 전부터 불렀던 이 노래처럼 세상 사람 모두 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ehind>


키워드 : 아파트, 라디오, 꿈, 봄, 경비아저씨, 밤 10시


사실 이 키워드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는 스토리는 다른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라는 설정하에  

밤 10시만 되면 아파트 건물을 쓰담쓰담하며  특별한 기운을 받는 경비아저씨,  

오래된 고물 라디오와 교감할 수 있는 봄에 태어난 봄이라는 아이.


마치 ‘보건교사 안은영’에 나온 대사처럼  

“솔직히 기운이 좀 특별하세요.”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등장.


역시,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답다.

초자연적 힘을 가진 잘생긴 도깨비가 나오거나 영혼이 좀 교체되거나 이런 이야기들.

그렇지만 너무 사이코틱한 거 아닌가 싶어 조금 자제했다.


2019년 아파트 야시장 현장을 떠올려봤다.  

아파트 야시장은 밤 10시가 되면 분위기가 가장 후끈한 시간이지만

경비아저씨들은 쉴 새 없이 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그다음 날 새벽까지 말이다.

사람들이 즐기는 시간에 같이 앉아서 잔치국수라도 드시면 좋을 텐데 말이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에는 수다쟁이 경비아저씨가 계셨는데  

‘스테이크 푸드 트럭’이 오는 날이면 같이 줄을 서서

요리사 예찬을 하시는 분이 계셨다.

아저씨의 수다 덕에 줄 서는 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진다.


나름 미식가의 경비 아저씨.

하지만,  야시장이 있는 날은 아저씨들이 너무 바빠 보여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너튜브에서 핫한 (60대가 된) 권인하 가수처럼,  


30년 전에는 나름의 인생 전성기를 누렸을지도 모르는 60대 중반의 경비아저씨.    


그분들이 입주민들 비위 맞추느라  

낮게 행동하는 게 습관처럼 베인 모습을 볼 때면

어딘가 불편하고 짠한 마음이 있었다.  


지금은 이사를 왔지만

살던 아파트 부녀회의 소문도 그다지 좋지가 않아,  

나름 상상 아래 또 이런 이야기를 지어보았다.


별 이야기는 아니지만 비하인드 기록을 안 하면 나중에 왜 저렇게 했지?  

할까 봐 이렇게 끄적대고 있다.^^


택배 아저씨, 경비아저씨.  

사실 나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닌가?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함께 차별 없이 행복하기로 해요."


2019.09.

시골의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야시장이 열린답니다.

그 풍경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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