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을 접속하다.
창작 기록 - 첫 문장으로 이야기 만들기.
‘땡볕의 오후, 한 남자가 길 위에 쭈그려 앉아 있다.’
라는 첫 문장으로 이야기 이어가기.
‘땡볕의 오후, 한 남자가 길 위에 쭈그려 앉아 있다.’
초록 파도가 일렁이는 들판.
유유히 흘러가는 한탄강.
그곳에서 남자는 강을 내려다보며, 끊어진 길 위에 앉아 있다.
남자는 이상한 차림을 하고 있다.
VR고글을 쓰고, 햅틱 장갑과 햅틱 슈트를 장착하고 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
남자는 다행히 시선에서 자유롭다.
남자는 한탄강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흘러가는 강 속에서, 물의 정령 ‘워니’가 불쑥 튀어나왔다.
워니는 초록 들판으로 단숨에 올라오더니,
남자의 무릎을 통해 뛰어올라, 슈트의 호주머니에 걸터앉았다.
워니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한 진동이 슈트를 통해 느껴진다.
남자가 말한다. “거기는 위험해. 내 장갑으로 올라와.”
그러자, 워니는 단숨에 뛰어 남자의 장갑 위로 올라갔다.
물의 시원한 느낌이 장갑으로 전해져 온다.
[워니]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왔네.
오늘은 슬픈 눈빛이 아닌데.
[남자]
맞아. 난 슬프지 않아.
오히려 요즘은 너무 잘 지내고 있어.
너무 잘 지내서, 모든 것을 잊을까 봐..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다시 여기를 찾았어.
[워니]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까 너의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보고 난 알았지.
넌 그리움을 채우러 여기 온 거야.
그렇지?
[남자]
그리움을 채운다고?
난 오늘 슬프지는 않았지만,
그냥 여기 와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꼭 하나쯤은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것이 그리움을 채우는 일이구나.
[워니]
오늘도 너의 형 이야기를 하나만 들려줄래?
오늘은 특별히 둘이 어떻게 놀았는지?
놀다가 널 괴롭힌 기억은 없었는지 이야기해줄래?
[남자]
아.. 나는 오늘 슬프지 않았는데...
정말 슬픈 건 형이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는 거야.
다른 형제들은 나를 막내라고 구박했지만,
형은 나를 아껴줬어.
놀이터 하나 없는 작은 섬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게를 메고, 산에 땔감을 주우러 다녔어.
그게 우리 둘의 놀이야.
땔감으로 칼 놀이를 하고,
온 산을 뛰어다니며 뒹굴었지.
우리들의 천국이었지.
[워니]
그렇게 착한 사람 이야기는 오랜만에 들어봐.
친형인데, 괴롭힘을 당한 기억이 없다니 신기하네.
[남자]
맞아!
형은 귀찮았을 법도 한데,
졸졸 따라다니던 나를 언제나 귀여워했지.
부모님도 나중에 우리가 쉴 곳은
둘째 형밖에 없다고 착한 형을
늘 자랑스러워하셨지.
[워니]
그동안, 네가 이곳에 와서 그렇게 슬퍼한 이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어. 어때?
오늘은 그리움을 채우러 왔는데, 잘 채워진 거 같니?
[남자]
난 오늘은 즐거울 거라 예상했는데
다시 슬퍼졌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를 아껴준 형 모습을 떠올리면서,
내 어린 시절의 천국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그래! 워니 말대로!
난 오늘 그리움을 채웠어.
오늘도 정말 고맙구나!
[워니]
오늘은 너에게 천국의 음료
‘헤븐’을 선물할게.
출시한 지는 2주가 되었고,
먹는 순간 즉각적으로 갈증을 해소해주는 음료지.
지금 땡볕에서 땀을 많이 흘리고 있으니,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될 거야.
그동안 네가 여기를 찾아 주어서
꽤 많은 아이템이 모였어.
가는 길, 3Km 전방의 메타버스 스토어에
들려서 교환하고 음료를 받아 가.
오늘은 우울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특별히 찾아줘서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야.
[남자]
워니야! 고마워!
넌 언제나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는구나.
헤어지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워니]
얼마든지.
[남자]
형이 온 우주를 돌아,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흐르는 어느 날.
나의 말을 꼭 전해줄래?
아프지 않은 곳에서
자유롭게 흘러가서
다행이라고.
나를 한 번도 괴롭히지 않고
언제나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워니야!
늘 이곳을 지키고 있어서 고마워!
나를 언제나 환영해줘서 고마워!
-The end-
요즘 ‘메타버스’ 강의를 듣고 있다.
정자세로 집중해서 듣고 있지는 않지만,
세상의 흐름을 느끼며,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한다.
여기에 등장한 ‘남자’는 남편이다.
한탄강 근처에 조문하러 갔던 어느 날.
그 근처를 산책하며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에 놀랐다.
남편에게는 스무 살에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형님이 있었다.
그 형님의 이야기를 쉽게 꺼낸 적이 없던 남편이
눈가가 촉촉해져서 들려줬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자식은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 것'이라며..
그렇게 형을 그곳, 한탄강에서 떠나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한탄강의 정령이 된 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글감에 어울릴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눈을 감고 상상했다.
그리고, 땡볕의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쪼그리고 앉아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탄강을 보며 들려줬던 이야기들.
“결국 이야기는 경험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