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올해 상반기에 우리 국에서 세 명이 사표를 던지고 회계법인으로 이직을 했다. 퇴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던 동기가 갑작스럽게 퇴사 발표를 해서 남겨진 이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우리로서는 실력있는 동지를 잃는 셈이어서 말리고도 싶었으나, 외벌이 공무원 월급으로 대출금까지 갚아가며 생계를 꾸리기가 빠듯했을테니 적극적으로 말릴 수가 없었다.
입사 동기가 150명쯤 되는데 14년이 지난 지금 절반 정도는 퇴사를 했다고 한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정년퇴직을 할거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우리국 퇴직 러쉬를 보며 마음이 적잖이 흔들렸다. 뭉기적거리다가 좋은 기회가 없어지는건 아닐까, 여기서 안주해도 되는걸까, 하는 심난함에 한동안 끙끙 앓았다.
한편에서는 정년까지 자리가 보장되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너도 나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정작 국세공무원이 되고 나면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아이러니라니. 많지는 않지만 따박따박 꽂아주는 월급과, 국민연금보단 넉넉할거라 예상되는 공무원 연금을 두고도 왜 우리는 퇴사를 꿈꾸는 걸까?
대부분이 월급 때문에 퇴직을 꿈꾼다. 2021년 9급 1호봉 기본급이 1,659,500원이다. 여기에 식비 10만원 정도가 붙고 부양가족 수당 몇 만원을 붙이고 건강보험료, 연금기여금 등등을 떼고 나면 실 수령액이 150만원이 채 안될 것이다. 내가 만약 9급으로 입사해서 지금 8급 13호봉이라면 기본급이 2,722,500원이니 실 수령액은 250만원 정도로 예상된다. 쥐꼬리만한 월급이라고 풍문으로 들었소만은 막상 상당한 시간과 돈을 들여 시험을 통과한 후에 최저시급 수준의 월급이 통장에 꽂힌 것을 보고 현타 오는 신규 직원도 많을 것이다. 우리청 내부망 익명게시판엔 월급이 너무 작은데 일은 고되니 능력 되시는 분은 빨리 탈출하라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7급으로 시작하면 대출금 없는 경우 그런대로 먹고 살만 하고, 5급으로 시작하면 대기업 수준에는 못미쳐도 그럭저럭 살아갈만 한 것 같다. 본인 형편이 빠듯하다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국세공무원 퇴직 이후의 진로는 세무사 자격증 유무에 따라 시기와 경로가 다르다. 2001년 이전 입사자의 경우 5급으로 5년 이상 근무하면 세무사 자격증이 자동으로 부여되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가 위헌판결을 받아서 2001년 입사자부터는 세무사 자격 시험에 합격해야만 세무사가 된다.
국세공무원 경력 10년 이상이면 세무사 1차 시험을 면제하고, 경력 20년 이상이면 2차 시험 중 세법학 1, 2 두 과목을 면제한다. 입사 후 순환보직 5년간은 매년 새로운 부서에 배치되므로 새로운 업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 이후엔 한번씩 해본 업무인데다 어지간히 적응도 해서 세무사 1차 시험이 면제되는 10년차가 될 때까지 세무사 2차 시험을 짬짬이 준비하다가 세무사 시험을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분들이 많다.
(그렇게 어영버영하다가 20년차가 되어 두과목만 준비한다는 분들도 많다.)
세무사 자격증이 있는 경우에도 정년까지 완주하거나, 중도에 퇴직하거나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정년까지 완주할 것인가?
연공서열이 확실한 공무원 조직 특성 상 입사 초반엔 세무서에서 각종 민원에 시달리느라 힘들지만, 세월이 흘러서 승진도 하고 관리자 위치에 오르면 주로 결재만 하면 되니까 일이 편해진다. (물론 서장님이 되어서도 체납 실적이 저조하다고 지방청에 혼나러 간다든지, 성난 민원인이 세무서에 뛰어와서 서장 나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가끔이니까...)
그렇게 어영버영 관리자로 살다가 정년퇴직한 후에 마지막 근무지 근처에 세무사 사무소를 개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엔 법인세과 직원들이 관내 법인에 부탁해서 퇴직 후 개업하신 서장님과 고문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알선했다고 하더라만은, 지금은 청탁금지법 때문에 고문의 ㄱ도 꺼낼 수 없다. 그러다보니 환갑 다되서 세무사 사무소를 개업하고 맨땅에 헤딩하기는 쉽지가 않다. 최종 목표가 개업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퇴직해서 개업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언젠가 차릴 치킨집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차려야지.
형편이 넉넉하거나 생활이 미니멀한 사람이라면 정년까지 완주한 후에 작고 귀여운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중도 퇴직할 것인가
국세공무원이 세무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일할 때 도움도 되거니와, 일하다가도 언제든지 호기롭게 사표를 던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자격증이 주는 장점이라 하겠다. (실제로 힘든 상사를 만나서 사표를 던지고 사무소를 개업하거나 회계법인으로 이직하는 분이 우리 국에도 더러 있었다.)
중도에 퇴직하는 경우 대체로 세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다.
국내에는 소위 빅펌이라 불리는 대형회계법인 4곳이 있다.
PwC삼일회계법인, E&Y한영회계법인, Delloitte안진회계법인, KPMG삼정회계법인
빅펌의 세무본부에서 국세청 출신 세무사를 종종 채용하곤 한다. 체감 상으로는 5년 주기로 티오가 발생하는 느낌인데, 아무래도 빅펌에서 억대 연봉을 받더라도 월급쟁이는 월급쟁이인지라 개업하러 나가는 분들이 있어서 자리가 나는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예전엔 빅 펌으로 이직하면 연봉이 2~3배 뛴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2배 받기도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국세청 경력 10년차에 연봉이 5천만원 쯤 할 때 빅 펌으로 이직해서 1.5억을 받아서 연봉 3배라는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요즘은 경력 15년차도 1억을 못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력 15년차가 이직해서 잘 받으면 1.2~1.5억일텐데 많으면 많다고 할 수 있겠으나 연금과 명예퇴직 수당 등등을 고려하면 좋은 선택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빅펌의 세무사는 주로 조사대응 업무를 한다. 회계장부와 관련해서는 회계사가 훨씬 잘 알지만 조사팀이 어떤 항목을 중점적으로 보는지, 과세논리를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는 회계사보다는 세무사가, 세무사 중에서도 국세청 경력이 있는 세무사가 잘 아는 편이다. 세무조사가 진행될 때 국세청 경력이 있는 세무사가 조사팀과 회사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잘 해주면 보다 원만하게 조사가 마무리되기도 한다. 단순히 전관예우라든지 인맥의 문제는 아니고, 조사를 해본 사람이 조사팀의 관점을 좀더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빅 펌으로의 이직을 위해서는 조사국 경력을 쌓아야 한다. 본청 조사국은 실제로 기업 조사를 하지 않고, 대기업과 외국기업이 많은 곳은 서울이다보니 서울청 조사국 경력이 유리하다. 중부청에도 S전자 같은 대기업이 있으니 중부청 조사국도 괜찮을 것 같다.
빅 펌 외에도 요즘은 김앤장이나 광장 같은 법무법인에서도 조사대리를 많이 하는데, 연봉 수준은 빅 펌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업무는 법무법인이 좀 더 빡세다고 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아무리 억대연봉이더라도 결국 월급쟁이고, 연차가 쌓일수록 일감을 따와야 하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보니 파트너가 되지 않는 이상 결국엔 자기 사무실을 개업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빅 펌에서 만나는 고객은 대기업이나 외국기업이다보니 개인 사무실을 차려 내 고객으로 삼기엔 레벨 차이가 크다. 그래서 빅 펌으로 이직 후 개업을 하나 퇴직하고 바로 개업을 하나 맨땅에 헤딩하기는 매 한가지다보니 바로 개업하는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빅 펌을 제외한 각종 회계법인, 세무법인들이 생각보다 많다. 하는 일은 빅 펌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고객층이 좀 다르다. 아무래도 대기업과 외국계 회사는 빅 펌을 선호하고, 중견기업 이하는 그 외의 세무법인과 거래하는 편이다.
세무법인에는 연봉을 받고 일하는 근무 세무사도 있지만, 지분을 갖고 참여하는 파트너도 있다. 사무실 운영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세무사 여러 명이 세무법인(유한회사)를 설립하는 경우도 많다.
근무 세무사인 경우 연봉은 빅 펌보다 낮은 편이며, 파트너인 경우 자기가 영업을 해서 일감을 따오는만큼 영업이익을 배분받을 수 있으니 하기 나름이다.
세무서에서 가까운 건물마다 "ooo 세무사 사무소" 간판이 즐비한데, 기장을 담당하는 직원 몇 명과 세무사로 구성된다. 기장 업체 100개 정도면 사무실 임차료와 직원 월급, 경비를 제외하고 퇴직 전에 받았던 월급 수준의 돈을 집에 가져갈 수 있다고들 한다. 사무실을 차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고객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것은 아니어서 전단지를 돌리든, 인맥을 동원하든, 유튜브나 블로그를 하든 열심히 영업을 해야 기장 업체도 생기고 상담을 의뢰하는 고객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기존에 영업 중인 세무사 사무소의 매출 몇 년치를 프리미엄으로 주고 인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기장 업체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어야 운영비도 충당되고, 그 업체 중에서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 조사대리를 수임하고, 불복청구도 하고, 아는 사람도 소개받게 되므로 일정 수준의 기장업체는 영업 밑천이 된다고 하겠다.
어떤 날은 사표를 던지고 개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거창하게 세운다.
어떤 날은 굳이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야하나 싶어서, 정년 퇴직 후에 생활을 미니멀하게 꾸리면서 연금으로 먹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민이 많다는 것은 지금 생활이 딱히 불만스럽지 않아서일수도 있고,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아서일수도 있겠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니 여기서 더 배워야겠다는 마음도 있다. 국세경력 14년 3개월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하겠으나,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부끄럽지 않은 국세인이 되려나.
하나 분명한 것은 끝날 때 까지는 끝난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복 디자이너에서 국세공무원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제3의 인생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면 제3의 인생으로 가는 길이 보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