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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Nov 28. 2023

타이페이 스토리 3. 애쓰지마요

희미해져가는 손바닥을 바라보며

7. 손을 너무 꽉 쥐면 손톱자국만 남을 뿐이지


여행을 갈 때마다 엑셀로 여행 계획을 세운다. 크게는 오전/오후/저녁으로 나눠 세시간 단위로 일정을 나누고 칸마다 시간대를 적는다.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날 때는 수련회처럼 정해진 시간표를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 조금이라도 틀어지지 않게 정말 꽉 꽉 채워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여행의 묘미는 바로 불상사라고, 계획한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을 수번의 여행 끝에 알게 되었고, 플랜 B와 C까지 확인을 해서 이동을 하곤 한다. 근데 이 또한 틀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예전에는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성질이 났다. 심지어 같이 여행을 간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할 정도로 계획을 지키는 것에 진심이었는데, 어떠한 사건 이후로 이런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상하게 6월에 떠난 대만 여행은 계획조차 하루 전 날, 아니 그 날 오전까지 짰다. 비행기와 숙소 그리고 여행지에서 쓸 카드발급까지 겨울에 다 끝내놓고 정작 중요한 계획은 부랴부랴 짰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회사 동료분이 나에게 '대리님, 계획 언제 짜세요?'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번아웃과 불안장애가 찾아왔던 나의 지난 1-2년은 일을 미루고 미루다 데드라인이 다가오고 나서야 부랴부랴 일을 수행하는 것의 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행을 가기 전 부랴부랴 짠 계획대로 대부분 움직이긴 했지만, 6월에 떠난 나의 타이베이 여행은 일탈 그 이상이었다. 경계 안의 자유, 자유 안의 경계. 번아웃과 불안장애에서 오랜만에 해소되었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10월에 다시 떠난 대만 여행은 본연의 나처럼 계획을 다시 수립하고 체크리스트를 적어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전처럼 빡빡하게 계획을 지키는 것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분위기에 잘 녹아들기로 결심을 하고, 큰 테마와 계획을 정하고 떠났다.


10월에 떠난 대만 여행 계획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왜 자유를 느꼈냐면,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일상의 일탈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여행을 쾌락이라고도 표현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해 일부 공감하는 바도 있지만, 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 때론 그 자유가 무섭게 다가오지만, 자유 안을 유영하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내가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다.


앞서 말했듯 난 불안장애와 번아웃이 있었다. 일을 좋아하는 나에게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는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고,  A를 찍으면 A라는 결과물을 내면서 나를 잊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 아이디어를 가져가도 까버리기 일수였고, 이를 극복하고자 무작정 제주도도 떠나보고 여러 콘텐츠와 강의,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접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콘서트와 페스티벌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기기도 하고, 매일 요가를 하면서 숨을 쉬곤 했지만 이 역시 그 뿐이었다.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야 하는 나에게 이런 순간들은 그저 도피였고, 현실은 나를 다시 그 공간, 그 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그 불안장애와 번아웃은 한번에 터져버렸다.


모든지 빠르게 습득하는 것은 나의 장점이라 생각했는데, 단점으로 나에게 꽂힐 줄은 몰랐다. 일적으로 따지면 트렌드를 빨리 읽는 성격에 마케팅 일이 즐겁고 적성을 잘 찾았다 생각하지만, 다소 보수적인 회사에서 이는 먹히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을 빨리 습득해야한다는 아무도 정해주지 않은 강박에 패션, 영화 등 모든 트렌드를 엄청나게 빠르게 먼저 시도했다. 그런 탓에 나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내가 스스로 단정짓기 시작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에 혼자 조급해졌다. 그래서 시도를 했다가 빠르게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늘 손을 꽉 쥐고 살았던 나에게 대만은 손을 좀 펴고 살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거 같았다. 일례로 커피를 사려고 계산을 하는데 동전이 아무리 찾아도 안나오는 것이다. 답답해서 혼잣말로 '아 어디있어'라고 말하고 있는데, 직원분이 '천천히 해'라고 말해줬다. 사회의 빠름을 싫어하면서 정작 누구보다 빠르게 살려고 하는 모순적인 나에게 저 한마디는 대만 여행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손톱 자국이 손에 박히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혹은 그 흔적을 즐겼는지 모를 나에게 이젠 그 흔적이 좀 옅어지고 손을 펴게 되었다.


고작 3박 4일의 대만 여행이었지만, 이 때 만난 대만 덕분에 지금도 힘을 빼고 살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맞닥뜨린다. 작은 선택이 큰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타이베이에서의 3박 4일은 나에게 종이 한 장이었다.


그로부터 한국에 와서 좀 더 여유롭게 살기로 했다. 물론 그 뒤의 나의 회사 생활은 더욱 처참했다. 불면증이 다시 올 정도로 힘들게 다녔고, 매일 회사에 오는 것이 나에겐 지옥이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과 변한 것이 있다면 나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려 했다. 어느정도 스스로 바운더리를 정해놓되, 가두지 말자. 손을 쥐지 말고 피자. 스스로 되뇌였다. 


경계 안의 자유, 이 것이 내가 대만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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