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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Nov 23. 2023

타이페이 스토리 1. 비 언제까지 내리는거에요?

비는 내리지만 발걸음은 멈출 수 없다

1. 인천공항에서의 하룻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캡슐호텔에서 자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코로나 이후 처음 떠나는 해외인지라 4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겨 인천공항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락휴는 생각보다 편했다. 다만 여행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나의 마음은 편하지 않아 결국 준비한 타이베이* 여행책을 뒤적거리며 2-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짧은 시간 잠을 자면서 공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이를 테면 몇 번 게이트로 가라, 게이트가 변경되었다, 수속 시작한다는 소리 등 공항에서 잠을 자고 깬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동시에 마음 속에서는 여행의 시작이 다가왔구나라는 묘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 타이베이가 맞아서 통상적으로 글에서는 타이베이라 기재하겠다)


다락휴에서 나와 마주한 인천공항. 나무와 공항의 표지만 너무 낭만적이야


6월 연휴의 중간이었던 일요일이라 그런가 사람이 북적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항의 공기와 설렘이 날 휘감았다. 아침으로 김치찌개를 먹고, 오랜만에 면세품을 수령하고 비행기를 타기 전 커피까지 샀다. 이때만해도 대만이라는 나라와 타이베이라는 도시보다 비행기를 타고 오랜만에 해외로 나가는 설렘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국의 날씨는 얇은 긴팔과 반팔을 입을 정도의 날씨였는데, 대만의 날씨는 한여름도 아닌 찌는 여름의 시작이었다. 더군다나 대만의 일기예보는 맞지 않기로 유명한데, 하필 내가 가는 시기에 비소식이 3일 내내 있는 것이다. '맙소사. 오랜만에 해외여행가는데 비가 온다고? 제발 오지 마라. 오더라도 적당히만 와라' 라는 생각을 하며 스르륵 잠들고 보니 비행기가 곧 착륙을 한다는 안내 메세지가 나왔다. 출발하기 전 뽑은 바우처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몸보다 소중한 여권을 꼭 챙긴 뒤 비행기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날 맞이한 것은 대만의 습도. 습한 나라에 도착하면 나는 묘한 사우나냄새가 있는데, 그 사우나 냄새가 딱 날 반기는 것이다. 그래 나 해외다 해외!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대만



2. 입은 기억하는 중국어


1년의 중국 북경 유학, 3개월의 상해 생활이 무색하게 중국어가 많이 잊혀졌다. 중간 중간 HSK 5급도 다시 공부해서 따고, 중국어 회화 과외도 받고,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중국어 대본집까지 사서 외우려고 시도를 했지만 중국어를 쓸 일이 없으니 입에서 지워졌다고 생각을 했다. 대만에 가기 전, 꼭 중국어 공부를 다시 해서 가야지! 하고 결심을 했는데, 이 결심이 무색하게 출국 앞둔 일주일 전 부랴부랴 여행 중국어 발음 연습을 했고, 그저 나의 감이 잘 살아있길 바랬다.


공항 수속을 밟고 e-gate*를 등록하러 전용 라인에 섰다.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 e-gate 등록했다는 바우처를 보여주고, 사진찍고 여권에 e-gate 도장을 찍었더니 끝. 근데 어디로 나가는지 몰랐던 나의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請問一下,我怎麼走(qingwonyixia, wo zhen me zhou?)(하나만 물을게요, 어디로 가야하나요?) 시작은 어려웠지만 막상 내뱉어보니 입에서 나오는 중국어가 신기했다. 말은 안한지 오래 되어 비록 성조가 조금 틀렸지만, 꿋꿋하게 중국어로 얘기했다. 기억나지 않는 단어들도 많았지만 입을 열면 나오는 단어들도 있었다. 이래서 언어는 반복이 중요하다고 하는거구나.

* e-gate : 대만에 도착해 빠른 입/출국 수속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미리 신청할 것. 한번 등록해놓으면 우리나라의 자동 출입국 심사처럼 굉장히 간단하다


대만 여행을 하며 중국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바로 우육면을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우육면을 먹으려고 웨이팅을 하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포장을 해서 숙소에서 먹으려고 했다. 점원에게 가서 '我可以打包嗎?(포장 가능한가요?)‘라고 물었는데, 인상을 찌푸리면서 뒤로 가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갔는데, 나중에 매장의 벽면을 보니 ‘外帶‘라고 적혀 있었다. 아, 대만에서 포장은 waidai(와이따이)라고 하는구나. 아차 싶었다. 요즘 같은 정세에 본토에서 배운 단어를 쓰다니, 물론 알고서 한 실수는 아니었지만 이후 대만에서 쓰는 용어들을 어느정도 배울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알았다. 


성조가 정확하지 않아 나에게 영어를 쓰라고 했던 점원도 생각이 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메뉴에 적혀 있던거라 날 무시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하는데,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성조를 좀 더 신경써서 말하게 되었다. 사실 중국어 과외를 받을 때도 선생님이 단어는 기억 잘 하는데, 성조가 부족하다고 발음 연습을 많이 하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리하여 10월에 대만을 갈 때는 일부러 천천히 말하는 것을 연습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6월보단 10월에 좀 더 중국어를 하는데 자신감이 붙었다.


언어는 말하지 않으면 잊혀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반복하고 체득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오래된 습관과 비슷하다. 앞으로 난 대만을 더 가게 될 일이 많을 거 같으니 좋은 습관을 다시 길들여 봐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고 고로 내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확장된 나의 세계를 좀 더 견고히 다져보겠다. 언제건 그 세계 속의 나와 주저없이 말을 할 수 있도록.




3. 비 내리는 대만, 물에 젖은 여행객


대만의 일기예보는 맞지 않기로 유명하다. 당장 내가 여행을 떠난 6월의 예보는 3일 내내 비가 온다고 그랬다. 다행히 첫 날에 3일 동안 내릴 비가 다 왔다.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로 이동할 때까진 비가 오지 않았고, 우산을 챙길까 말까 백번을 고민하다 놓고 나왔다. 하지만 왜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혹시 모르니 늘 우산을 챙기라고 했는지 몸소 경험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화산1914 창의문화원구로 걸어가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는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쏟아질 줄 모르고 본죽과 카카오프렌즈샵을 보면서 '여기가 성수야 대만이야' 인스타에 올리고, 예전 담배공장을 그대로 살려 문화예술을 위한 공간을 만든 것이 너무 멋있어서 감탄하고, 밖에서 열리는 주류 박람회에 신기함을 금치 못했다. 그리곤 안으로 들어와서 오르골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빗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


발이 묶여서 왔던 가게 또 가고 화산1914에서 열린 온갖 팝업스토어는 다 들어가고, 카페도 들어갔다가 도무지 금방 멈출 비가 아닌 거 같아서 다시 나오길 반복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숙소에 두고온 나의 노란색 우산이 떠올랐다. 아무리 양우산을 살 계획이 있었다지만, 이렇게 급하게 살 계획은 없었는걸요. 화산1914의 지리를 외울만큼 돌아다니다 이 곳에 발이 묶일 것만 같아 급한대로 우산을 파는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화산1914 안에 있는 영화관을 보았다. 그 날 어떤 영화가 개봉을 한 것인지, GV를 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많은 관람객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크게 걸려있는 포스터에 전주에서 본 영화의 포스터가 있어서 신기했고(왜냐면 한국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배우 양조위의 비정성시가 4K 리마스터링이 되어 재개봉을 하고 있었다. 대만에 가서 좋아하는 양조위의 작품을 보는 낭만을 선택하려 했지만, 파워 J인 나는 계획된 낭만을 찾으러 우산을 찾으러 떠났다.


가까스로 양우산을 샀고, 발에 묶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와 당당하게 우산을 펴고 걸었다. 아니 근데 이게 왠걸? 비가 엄청 나게, 정말 엄청 나게 쏟아졌다. 양말을 신고 샌들을 신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양말은 다 젖었고, 금세 물웅덩이가 차기 시작했다. 이를 어쩌지? 하던 찰나에 화산1914에서 나오는데 플리마켓을 또 하는 것이다. 이런 나약한 나란 사람. 구경을 하다가 결국 양말을 사버렸다. 기분 좋게 나오는데 바로 앞에 '소일기'라는 매장이 있는 것이다. 대만 여행 책자에서 보고 가고 싶은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딱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우연히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만의 무인양품 감성이라는 말이 맞듯이 공간을 하나하나 살폈다. 나의 감성과는 조금 다른 공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 자체를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구경을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가는데,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농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았다. 아니 여기 완전 청춘 영화를 그냥 찍고 있네? 혼자 속으로 웃으며 횡단보도를 건너 정류장에 서자마자 버스가 지나가면서 내 몸에 물이 다 튀어서 그대로 쫄딱 젖었다. '아니 이거 환영 인사야 뭐야? 이렇게 젖는다고?' 너무 황당해서 옆을 봤는데, 나와 함께 기다리던 분도 이미 젖으셨다. 다른 버스가 오길래 급하게 우산을 펴고 막았다. 분명 비가 오는 대만이 좋았는데, 너무 많이 오니까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먹은거라곤 공항에서 마신 코코 밀크티가 전부였고, 양말과 가방은 다 젖었고 이젠 옷까지 다 젖으니 물에 빠쥔 생쥐 그 자체였다. 가까스로 버스를 타고 융캉제로 이동하는데, 비가 더 쏟아지는 것이다. 처음으로 인스타 스토리에 '이제 그만...'이라고 올리니 친구들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는 답장들을 보내왔다.


융캉제에 도착해서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천진총좌빙으로 향했다. 비가 온 덕분인지 웨이팅이 없어서 바로 구매를 했는데 비가 와서 먹을 곳이 또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속상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바로 앞에 스무시하우스가 보였다. 그래 가자. 어차피 혼자 왔으니 합석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빠르게 스캔하고 딱 두 자리 남은 곳에 착석을 했다. '不好意思,可以一起坐嗎?‘(실례지만 같이 앉아도 될까요?' 흔쾌히 내주셔서 자리를 맡고 주문을 하고 망고빙수를 가져왔다. 


옆에 대만 아주머니 두분이 앉아 계셨는데, 내 바로 옆에 앉으신 분이 날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싸늘함을 느꼈다. 아 그랬지. 아직 대만은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내가 분명히 중국어로 앉아도 되냐고 물었는데, 옆에서 중국어로 내 욕을 하는건 뭐지? 라는 생각을 했다. 욕의 내용은 그랬다. 혼자 와서 이 많은걸 다 먹으려고 하냐는 내용. 


너무 배고팠고 대꾸할 힘도 없어서 일단 입에 넣었다. 입에 넣자마자 내 머리에선 노란색 불꽃이 튀었고 입안에선 달콤함과 상큼함이 멤돌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시원함이 느껴졌다. 대만의 망고빙수구나. 아직도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망고 빙수를 먹던 기억이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던 한국 가족의 얘기가 들렸는데 내가 융캉제에서 가려고 했던 루트랑 똑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빙수를 먹다가 피식 웃었다. 



융캉제에 돌아다니며 잠시 멈췄던 비는 101타워로 향할 때 다시 오기 시작했다. 하필 걸어가려고 결심했을 때 오는 것이 억울했지만 우산이 있으니 그냥 걸어갔다. 도착하니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야경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니 가능하면 다음에 오라고, 볼 수는 있지만 다음에 오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보기 어려울 거 같아 그냥 큰 맘 먹고 위로 올라갔다.


101타워에서 본 대만의 야경은 아쉬었지만, 오히려 비가 떨어지는 하늘에서 보는 내려다 보는 기분이 들어 신기했다. 내가 또 언제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겠는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봤지, 비가 떨어지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진귀한 광경을 눈에 오래 담았다. 가끔 같은 것을 보아도 시야를 다르게 두는 것 만으로도 또 다른 세상이 열린 기분이 든다. 여행의 시작에 나를 쫄딱 젖게 만들었던 비는 하루 여행의 끝자락에 또 다른 기억을 남겨주었다.


비가 계속 내려 택시가 잡히지 않아, 결국 버스를 환승해서 숙소로 돌아가야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또 다른 추억을 쌓았다. 지금도 대만을 떠올리면 아련한 기억이 남아 있는 이유는 이런 기억들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 뒤로 나도 여행객들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모든 친절을 다해 설명해주려고 한다. 우리에겐 그냥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누군가에겐 사진처럼 기억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 나라와 도시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는 기억으로 남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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