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올라버린 햇빛 알러지의 잔상에 대하여
햇빛 알러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건 2015년에 떠난 일본 오사카 여행이었다. 이 때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5월 일본 여름의 햇빛을 반바지로 고스란히 맞으며 돌아 다녔다. 마지막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리가 너무 간지러운 것이다. 고등학생 때 급성 두드러기의 경험으로 동일한 증상인줄 알았는데, 사선생님의 소견은 햇빛알러지였다. 그 뒤로 여름에 몸에 선크림을 바르는 것을 습관화했다.
대만에 갈 때, 선스틱을 다 쓰겠다는 심산으로 열심히 들고 다녔다. 첫 날은 비가 많이 와서 살이 타지 않았으니 패스. 예스지투어를 떠난 두 번째 날부터 정말 시간이 날 때마다 선스틱을 온 몸에 발랐다. 이 때의 대만은 가이드도 인정할 정도로 덜 습한 날이었고(대만 기준) 해가 쨍쨍했던 터라 조금이라도 선스틱이 발리지 않은 쪽에 햇빛 알러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다음날은 꼭 선스틱을 꼼꼼하게 바르겠다고 결심을 하고 잠을 잤지만, 다음날은 다리가 난리가 났다. 생각해보면 선스틱이 땀에 흘러서 다 닦이지 않았나 싶긴한데 여튼.
살이 타는 것이 느껴지고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 것이 느껴져서 작은 손풍기의 바람이 소중했지만 대만의 뜨거운 햇빛과 맑은 하늘은 잊을 수가 없었다. 더위를 즐길 정도로 좋았다. 원체 여름을 좋아했지만 대만의 뜨거운 여름을 맛본 뒤로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 여름인데 살도 타보고 그을려도 봐야지. 타오르는 살갗이 초상이여.
6월에 만난 대만은 뜨거움이었다면 10월에 만난 대만은 그레이였다. 말그대로 하늘색이 그레이였다. 잿빛이라고 쓰기엔 10월의 대만도 재밌었고, 회색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채색같아서 그레이라고 우스꽝스럽게 표현을 해본다. 첫 날은 비가 오락가락하다 쌀쌀한 날씨에 챙겨온 가디건마저 춥게 느껴질 정도였고, 둘째날은 추우면서 습한 대만의 공기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자전거를 탔다. 6월에 뜨겁던 대만의 햇빛이 그리웠고 흐르던 땀이 그리웠다. 대만의 날씨는 여름에 가깝지만 어쨌든 시간의 흐름은 있지 않은가, 6월보다 짧아진 해가 섭섭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날에서야 해가 떴다. 하늘이 조금은 야속했다.
마지막날에라도 해를 봐서 어찌나 반갑던지. 조금씩 흘린 땀방울이 6월의 자유를 느끼게 해줬다. 6월의 뜨거운 대만의 여름낮은 갔고 남은건 볼품있었다. 10월 흐린 날씨의 대만의 중앙에서 '영원한 여름'을 느꼈다. 6월에 대만에 다녀오고 나서 대만 콘텐츠를 참 많이 봤는데, 미루고 미루다 본 '영원한 여름' 꿉꿉하고 습한 영화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영화 제목처럼 대만은 나에게 '영원한 여름'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일요일 오후와 노을. 일요일 오후가 싫은 이유는 월요일이 와서가 아니라 일주일이 마무리되는 느낌에 스산한 길거리의 분위기가 싫어서. 노을이 싫은 이유는 해가 지는게 싫어서. 둘 다 지는 느낌이라 정말 정말 싫다.
6월에 떠난 대만, 단수이의 일정은 세 번째 날이었다. 계획을 짤 때는 아무 생각없이 짰다. 단수이에 도착해서 뜨거운 햇빛 아래 홍마오청, 진리대학 등 코스를 땀 뻘뻘 흘리며 돌고 사진 찍고 노을 맛집이라는 연인의 다리에 가겠다고 버스를 타고 또 걸었다. 그리고 연인의 다리에 도착한 순간, 노을 싫어하는데 노을 잘 보겠다고 이 곳에 온 내가 기가 찼다.
단수이의 노을은 내가 본 노을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예뻤지만 뼈저리게 싫고 슬펐다. 하필 마지막날을 남겨 놓았던 터라 해가 지는 것이 어찌나 슬프던지. 전 날 지우펀에서 바라본 노을은 귀한 장면이라 이쁘다며 사진을 찍었는데(물론 이 때도 슬펐다) 같은 노을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다음 여행에서는 노을을 보는 일정을 절대 마지막날에 넣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연인의 다리에서 노을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으며 멍때리고 있었는데, 해가 완전히 지는 것까지 보면 정말이지 너무 슬플 거 같아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딱 한 번 뒤돌아보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노을은 나에게 그렇다. 슬프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줘서 슬프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딱 한 번 보았다고 에우리디케가 다시 하계로 끌려갔듯이, 나 역시 딱 한 번 뒤 돌아본 것으로 슬픔에 끌려간걸까?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창문을 바라보니 금세 저녁이 왔다. 휴우. 불이 켜진 단수이의 저녁은 아름다웠다. 찰나같은 노을의 순간이 지나면 좋아하는 야경이 나온다. 아이러니하다. 밤에도 해가 졌지만 어딘가에 떠있을텐데 그 해가 가는 찰나가 싫다고 마음속에 갖은 파동이 일어난다.
웃기게도 10월에 대만 다다오청의 일몰을 보겠다고 또 일정에 노을을 집어 넣었다. 그래도 첫째날 배치함으로써 슬픔을 조금 덜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0월의 대만은 흐렸다. 그래서 노을은 당연히 볼 수 없었고, 다다오청에서 바라보는 단수이도 흐렸다. 근데도 노을을 목전에 놓쳤는데도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그래도 아쉽다라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10월에 떠난 대만에서는 노을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신 멋진 야경을 많이 보았고, 즐겼고, 놀았다. 노을 따위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아마 다음 대만 여행 때, 나는 또 노을 맛집을 찾고 그 곳을 일정에 넣겠지. 과연 그 때의 노을을 난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또 노을보고 슬퍼서 해가 지기 전에 뒤돌아 나오곤 '아 노을 싫어' 이러면서 뒤도 안돌아보겠지. 그리고 반복될 거라는 것을 안다. 싫어서 더 생각나는 존재.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