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글이다

《연필로 쓰기》를 읽고

by 조형근

소설가 김훈의 《연필로 쓰기》를 읽었다. 저자는 1948년생으로, 70세가 넘었다. 그의 글은 오랫동안 갈고닦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일상의 단편을 정교한 단어로 담금질한 글을 읽으며 가슴 한편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가의 글쓰기를 배워보겠다는 심산으로 책을 펼쳤지만 따라 하려고 해도 따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년 동안 살아온 인생이 글에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살아온 날의 반 조금 넘게 산 내가 그의 글을 흉내 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한창 게임에 빠져있을 무렵 내 관심사는 오로지 게임이었다. 어떻게 하면 게임을 잘할 수 있을지 날마다 궁리했다.


취업을 준비할 때는 기업의 로고만 쳐다봤다. 이 회사, 저 회사의 장단점을 머릿속으로 수없이 비교했다. 텔레비전에 선망하는 기업의 광고가 나오면 그저 멍하게 바라봤다.


책을 쓸 때는 책 쓰기에 정신이 팔렸다. 책 쓰기 책을 여러 권 읽고 책을 쓰는 방법을 연구했다. 모든 현상이 책 쓰기로 보였다.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면서 그때그때 관심사는 달라졌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글에는 글쓴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내가 모르는 것, 겪어보지 않은 것, 생각하지 않은 것을 쓸 수는 없다. 읽는 이는 글쓴이가 제대로 알고 쓰는지 아닌지 간파한다.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이해한 것을 써야 한다.


깊이와 넓이가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선으로 글감을 바라봐야 한다. 직접 부딪쳐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지만 그게 어려울 때는 책을 읽어야 한다. 어떤 현상을 이 각도, 저 각도로 재보며 편견을 깨부수는 연습도 해야 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해석해야 한다. 여러 의견에 귀 기울여 생각을 조합하고 사고를 확장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볼 수 있는 만큼, 들을 수 있는 만큼의 글밖에 쓰지 못한다.




《연필로 쓰기》를 읽으며 저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일흔의 어른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같은 말이어도 저자가 걸어온 길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어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묵직했다.


책을 고를 때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본다. 몇 살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그의 생각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가늠한다. 그렇게 책을 구입하고 다른 이에게 추천도 한다. 책을 읽는 것은 글뿐만 아니만 저자의 삶을 읽는 것이다. 유명 저자의 책이 잘 팔리는 건 당연하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의 삶에는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글이 되고 글에는 삶이 옮겨진다.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글에도 그런 삶의 흔적이 담긴다. 독자는 저자의 행실을 믿고 책을 구매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책이 잘 팔리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현상의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려면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타인과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듣고, 똑같이 생각하면 똑같은 글밖에 쓸 수 없다.


《연필로 쓰기》는 날카로운 문장, 풍부한 어휘,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하다. 진정한 고수는 어떻게 글을 쓰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책을 읽고 가장 마음에 와닿은 것은 저자의 70년 삶의 흔적이었다. 어떤 삶을 보내느냐에 따라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가 정해지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적어나가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