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비치는 내 얼굴

by 조형근

아주 가끔,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내와 내가 모두 날이 서 있을 때가 있다. 서로 무표정으로 밥을 먹고, 무슨 말을 들으면 곡해하기 바쁘다. 반대로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즐겁게 웃어넘길 때도 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내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속상할 때도 있고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아내와 나 사이를 날씨로 비유하면


둘 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화창함'

둘 중 하나만 컨디션이 좋을 때는 '맑음'

둘 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흐림, 비'


가 된다. 다행히 한쪽의 나쁜 기운이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일은 별로 없다. 내가 우중충한 기분일 때도 아내가 하하 호호 웃으면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들어온다.




최근 책을 읽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같은 책을 읽는데도 내 마음에 따라 책이 훌륭해졌다가 별 볼 일 없어졌다.


멋들어진 문장이지만 귀찮다는 듯 흘려버릴 때도 있고, 단순한 문장인데도 손에 힘을 준 채 밑줄을 그을 때도 있다. 페이지 숫자를 늘리는 데 강박을 느낄 때도 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 채 몰입할 때도 있다.


어떤 점이 같은 책을 다르게 느끼게 만드는 걸까?


책을 읽는 자세, 눈빛, 책장을 넘기는 가지런한 손길이 차이를 만든다. 결국 내 마음이다. 책이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도 중요하지만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소 귀에 경 읽기라고 했던가. 나는 책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였을까.


머릿속에 잡념이 많으면 책을 읽을 때에도 잡생각에 휩싸인다. 글을 읽으면서 딴짓을 한다. 책을 펼쳤다는 것에 뿌듯해한다. 책 옆에 스마트폰을 올려두고 수시로 만지작거린다. 이도 저도 아닌 무의미한 시간이 흐른다.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할 때는 책에 서서히 잠긴다. 글이 술술 읽힌다. 마치 책의 저자가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서론 본론 결론 글의 전개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간파한다. 책을 읽는 순간이 황홀해진다.




좋아하는 책은 두고두고 읽는 편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그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다. 예전의 내 마음과 지금의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구절에 코끝이 시리거나 단어 하나에 빠져 곱씹을 때도 있다.


다독, 정독, 속독, 통독 등 여러 독서법이 있지만 최고의 독서법은 저자의 마음으로 글을 읽는 합독(合讀)이다. 내가 저자가 되어 그의 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 읽는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책을 읽기 전에 눈을 감고 30초만 숨을 고르자. 책을 힘껏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글을 읽으면 문장이 가슴에 스며든다. 시간이 흘러 나는 순간순간 저자가 된다.



책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책과 나의 관계는 나만이 정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책과 나 사이의 날씨가 달라진다.

따뜻한 봄날 같은 마음으로 책장을 펼치면 어떨까. 저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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