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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북살롱 Oct 24. 2021

캔버스에 저무는 한해를 비추어 보다

글: 히햐

    연말이 되면 누구나 그러하듯 올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올 한 해 이룬 성과, 경험, 느낌 등을 하나씩 떠올리며 1년의 시간 동안 어떠한 변화와 성장이 있었는지를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뤄낸 성과보다는 기대만큼의 결과가 있지 않음에 실망감을 더 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1월 초 내가 세운 목표와 현재의 나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1월 초 나의 상태와 현재 나의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올해 초 나는 어디에 어떻게 있었는가, 그리고 현재 나는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가 비교하다 보면 자신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년의 시간 동안에는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과 속도로 1년을 걸어온 것이겠죠. 미술작품 속에서도 마지막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 걸린 작품으로서 결과물이 주는 감동도 있겠지만, 그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울리는 것 같습니다. 

마크 로스코 <No.3/No.13(Magenta, Black, Green on Orange)>, 캔버스에 유채, 1949, 216x164cm,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인간의 내면의 감정을 색채로 표현했던 삭면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로세로 2미터 안팎 크기의 캔버스에 색을 경계 없이 면으로 칠한 화풍이기에 그의 작품은 색면추상, 또는 내면의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립니다. 그의 작품을 보며 비극적 감동을 느끼는 관람객들이 많기에 작가의 의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에 해석을 다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작품의 설명은 상상력을 마비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로스코의 충고에 따라 관람자인 나의 느낌으로 그의 작품과 만나 보았습니다. 그의 여러 작품을 하나씩 돌려 보며 나의 마음과 연결되는 하나의 그림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작품을 보는 동안 나와 작품이 동일시되는 지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No.3/No.13>이라는 그의 색면추상 초기작에 가슴이 울렸습니다. 먼저 여러 색이 겹쳐 올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황을 여러 겹 칠하고 그 색이 마르기 전에 녹색을 깔고 또 마르기 전에 다시 녹색을 덮으면서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검정, 자홍색 등을 겹쳐 올리면서 다양한 감정을 자아내게 합니다. 주황처럼 밝은 기대감으로 한 해를 시작했지만 짙은 푸른빛이 맴도는 검정은 깊은 슬픔과 혼란의 감정을 떠올리기도 하였으며 여러 색으로 빽빽이 칠해진 색들은 주변을 볼 겨를 없이 지내 온 올 일 년간의 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마크 로스코 <Black, Orange, Tan, and Purple on the Red and White>, , 캔버스에 유채, 1949년, 214.5x174 cm


    그의 작품 속에서 색상뿐 아니라 물감이 낸 자국에 더욱 자극을 받습니다. 유화는 기름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는데요, 오일의 결을 통해 물감이 들어가고 나간 자국이 경계선으로 보입니다. 물감과 기름의 성질이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번지는 모습과 물감이 수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물감의 미세한 변화의 과정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의도한 대로 완성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이 얼룩처럼 남아 있는 것이죠. <Black, Orange, Tan, and Purple on the Red and White>에서는 검정이 빨강과 주황 사이를 가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물감이 번지고 혼합되어 가는 자국은 마치 생명의 숨결처럼 꿈틀 거리기도 하네요. 작품은 작가의 호흡과 삶, 그리고 감정이 켜켜이 쌓인 색으로 표현되면서 우리에게 한 단어로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감정을 안겨 주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를 지나오면서 나 자신은 어떠한 색을 쌓아 올렸는지, 그 색을 쌓아 올리는 동안 나 자신은 어떠한 내적 성장을 하였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올해’라는 ‘캔버스’에 어떤 색을 칠하셨나요? 그 색이 주는 의미는 어떤 것들일까요? 그 색들은 의도한 방향대로 채색되었나요? 아니면 기름을 만난 물감처럼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나요? 내가 목표하지 않았어도 우연히 찾아온 뜻밖의 일들과 그것을 경험하는 나의 태도가 만나 울퉁불퉁하지만 묘한 자국을 만들며 저마다의 캔버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색이 때론 강렬한 보색으로 대비를 이루거나 혹은 동색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는 관계없이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칠해진 모든 색은 도전하고 나아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자아내게 됩니다.


자신만의 캔버스에 붓질을 하며 견디고 나아간 모두들!   

올 한 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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