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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북살롱 Oct 20. 2021

누구에게나 이별은

글: 나나

트레이시 에민 <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날 버리고 떠니지 마"였다 II>, 종이에 디지털 프린트, 2000,805 × 1095 mm, 테이트 미술관(TATE)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 / 조지 엘리엇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 그림보다 이별을 다룬 작품을 마주할 때 더 절절한 애정과 마음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사진 속 벌거벗은 여자의 유약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품의 제목 <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 II>를 읽는 순간 세상의 모든 외로움이 몰아쳐 옵니다. 


    처음 본 여자의 살굿빛 등에서 누구보다 빛났을 그와의 첫 만남, 한없이 행복했을 시간, 그리고 마지막 떠나는 그에게 ‘날 버리지 마’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그가 없이는 한없이 연약해져 버린 그녀의 사랑 모두가 스쳐 지나갑니다. 동시에 사진 속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스무 살 첫 이별을 겪은 내가 앉아 있습니다.




    영국의 현대미술 작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은 <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날 버리고 떠니지 마"였다>라는 두 개의 사진 작품을 푸른빛 오두막과 함께 전시했습니다. 이 오두막은 1992년 그녀는 영국 위스터블(Whitstable)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을 구매하고,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당시 남자 친구와 여름을 보냅니다. 비록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작고 낡은 오두막이었지만, 주머니를 탈탈 털어 구입한 나만의 첫 공간이 주는 안정감. 그리고 바닷가의 그 작은 공간을 함께 채우는 남자친구. 모든 순간이 얼마나 반짝반짝 했을까요. 하지만 에민이 달콤한 시간을 상상하던 그때, 그는 그녀에게 이별을 말합니다.


    1999년 에민은 이 오두막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기고 <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날 버리고 떠니지 마"였다>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오두막은 모든 반짝임을 잃고 군데군데 구멍 난 상처를 급하게 메꾼 듯 큼직한 나무판자가 덧대어져 있습니다. 이별이란 그렇게 나의 속도와 다르게 덜컥 찾아오기도 합니다. 둘의 미래를 상상했을 에민과, 같은 시간 이별의 단어들을 조심히 골라냈을 연인의 온도가 달랐던 것처럼요.


    1980년대 말 영국의 현대미술을 이끈 yBa(young British artists)의 멤버인 트레이시 에민은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작품 속에 고백적으로 담아냅니다. 그녀가 애인과 머물렀던 오두막은 마치 일기장 한쪽을 부욱 찢어 전시장에 옮겨 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업은 보고 있으면 감정이 휘몰아치는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솔직하면서도 파격적인 섹슈얼 메시지를 던지는 에민의 작품들은 종종 그녀의 불운한 어린 시절과 연결 지어 해석됩니다. 불륜 연인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애인에게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하고 가출합니다. 성폭행의 트라우마는 그녀를 꾸준히 괴롭혔고, 홀로 두 번의 낙태 수술과 유산이라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볼 때마다 ‘트레이시 에민’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서 그녀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감정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하기 때문이겠죠.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우리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징그럽게 사랑하고 또 세상이 무너지듯 헤어져 보기도 했을 테니까요. 


    평생을 함께해온 가족보다도 나를 더 깊이 이해한다고 믿어온 연인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도 합니다.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순간에 그는 ‘나는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던지거나, 지쳐가는 내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를 보며 이별을 말할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 <무제(완벽한 연인)>, 시계, 1991, 35.6 x 71.2 x 7 cm, 뉴욕 모마(MoMA)


    쿠바 출신의 개념 미술 작가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1957-1996)는 <무제 (완벽한 연인들)>를 통해 사랑과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별'하면 떠오르는 작품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는 똑같은 시계 두 개를 구매해 같은 시간을 맞춰 두고 동시에 새 건전지를 넣은 뒤 시계가 서로 맞닿게 전시장에 걸어 두었습니다. 생각대로라면 동시에 시작한 시계는 동시에 멈추어야 할 텐데 흥미롭게도 기계의 필연적 결함에 의해 조금씩 다른 속도로 움직이다 결국 한 개의 시계가 먼저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눈치채지 못한 채 먼저 덜컥 멈춰 버린 시계처럼, 이별도 종종 그렇게 소리 없이 덜컥 찾아옵니다.


    <무제(완벽한 연인들)>는 곤살레스-토레스의 연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 1959–1991)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유색인종이자 성 소수자였던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연인 레이콕은 에이즈로 191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곤살레스-토레스 역시 1996년, 그의 연인 레이콕과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무제(완벽한 사랑)>는 그와 레이콕을 떼어 놓은 생물학적 시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덜컥 찾아온 질병에 언제나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둘의 시간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먼저 힘을 잃어가는 연인의 시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두렵지만 곤살레스-토레스는 둘의 남은 시간을 똑바로 마주하기로 합니다. 



시간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두 개의 시계로 만든 이 작품은 내가 해온 작업 중 가장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계를, 직면하고 싶었습니다.
/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


<뉴욕 존스 해변에서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와 로스 레이콕>, 칼 조지, 1986


    오두막에 남은 트레이시 에민, 그리고 곤살레스-토레스에게 그랬듯이 이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다가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이유와 함께. 그러나 이별의 폭풍이 무서워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더 뜨겁게 사랑합시다. 유한하기에 더 소중한 오늘을, 그리고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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