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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북살롱 Oct 23. 2021

후회하고 싶지 않아.

글: 다행

    올해 제 나이 40. 제 인생의 중간 지점 정도라고 여겨지는 올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페루 정부에서 발주한 G2G 사업이 있는데요, 만약 이걸 우리나라 컨소시엄이 따낸다면 페루 리마에 3년 동안 파견될 예정이거든요. 최소 4개국 간의 경쟁이고, 얼마 전 페루 정권이 바뀐 게 문제이긴 하지만요.


    해외 근무가 뭐 그렇게 큰 갈림길이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도 많으실 겁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직 (노)총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결혼해도 한참 늦은 판에 외국, 그것도 엄청나게 먼 페루에 3년이나 다녀온다면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견 제안을 받았을 때는 10분 만에 결정하고 콜백했습니다. 꼭 우리나라에 머문다고 결혼한다는 보장이 없고, 제 로망인 해외 근무도 흔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거절한다면 오래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폴 고갱, <나페아 파 이포이포(언제 결혼하세요?)>, 유화, 1892년, 105 x 77.5cm


    이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년, 프랑스)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전 세계 여러 곳을 전전했는데요, 유년기의 대부분은 페루 리마(1850-1854년, 1849년부터라는 말도 있음)에서 보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가족이 프랑스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프랑스 및 페루계였기에 친척이 있었거든요.


    그가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10대 후반에는 항해사가 되어 6년간 대양을 누비다가 20대 중반부터 주식중개인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엔 꽤나 잘 나갔습니다. 그리고 곧 결혼하여 아이도 다섯이나 갖게 되었습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다 보니 미술 작품 수집과 그림 그리는 일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인 1882년에 주식 시장이 붕괴해버렸고, 이듬해에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직장을 그만두면서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동안 가장의 역할(최소 금전적)을 충실히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평론가로부터 어느 화가도 그처럼 그려내지 못할 거라는 극찬까지 받았을 정도라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와 가족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집니다. 어느 세계든 인정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특히나 유명과 무명 간의 격차가 극명한 미술계에서 말이에요. 그동안 쌓아온 부를 잃어갔고, 남은 생은 처절한 생계 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폴 고갱, <테하마나는 조상이 많다>, 캔버스에 유채, 1893년, 75 x 53cm, 시카고 미술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서 비평가들이 화가를 노예로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폴리네시아와 같은 원시적인 오지에 가서 문명의 영향과 세상의 의무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미술 활동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갔습니다. 그가 비평가에게 불만을 가졌을지라도 결국은 인정받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알린)에게는 언젠가 아빠가 최고라는 걸 알게 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오랜 시간이 흘러 성공하긴 했습니다. 앞서 보신 <나페아 파 이포이포(언제 결혼하세요?)>는 지난 2015년에 지금 돈으로 무려 3,100억에 거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성공은 너무나 오래 지난 사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홀로 죽는 순간까지도 무일푼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딸 알린은 아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이는 성공에 대한 욕구를 조절하는 데도 쓰입니다. 만약 그가 그런 의지와 욕구를 조금 조절했다면 어땠을까요?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캔버스 업체의 영업사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걸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비극적인 죽음도 피하고, 넘치지는 않아도 가족과 함께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폴 고갱, <눈 덮인 브르타뉴의 마을>, 캔버스에 유채, 1894년, 62 x 87cm, 오르세 미술관


    1895년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가족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적었습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도 못했고, 10대 소녀인 테하마나를 비롯한 여러 정부(情婦)와 지냈던 그였기에 이는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몇 년 전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1903년, 폴리네시아의 한 섬에서 50대 중반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는데, 당시 이젤에 걸려 있던 작품은 <눈 덮인 브르타뉴 마을>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1894년에 프랑스에서 지낼 때 그리다 말았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을 이 작품과 함께했던 건 아마도 지난 과거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만약 저의 바람대로 우리나라가 사업을 따내어 페루에 가게 된다면 저의 선택은 과연 어떤 미래를 만들게 될까요? 물론 지금은 전혀 알 수 없겠죠. 언젠가 제 인생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때 그때는 알 수 있을 겁니다. 부디 그때 제 선택이 최소한 잘못된 건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금처럼 스페인어 공부도 꾸준히 할 겁니다. 나중에 미리 스페인어 공부해둘 거라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혹시 또 아나요? 제한된 환경에 있다 보면 눈도 잘 맞고 그러니까 오히려 여기보다 나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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