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잎클로버
이 그림은 영국의 화가인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입니다. 그는 ‘라파엘 전파’라는 사조를 만들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인 라파엘로 이후의 경향은 위대한 화가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이었는데요,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 모방하지 말고 사람의 감정, 정신과 자연을 그리자는 움직임이었지요.
그림을 보시면, 방에서 한 노인이 소파에 기대어 있습니다. 그는 박제된 빨간 새를 안고 있으며, 그의 옆에는 두 아이가 새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습니다. 노인의 발 아래쪽에 있는 소녀는 상대적으로 흥미가 떨어져 보이네요. 왼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는 올빼미와 다른 새의 박제들이 있어, 이 집의 주인인 노인이 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 그림의 부제는 ‘조류학자’인데요, 노인은 자연사학자이자 삽화가인 존 굴드입니다. 굴드는 평생 새를 연구한 연구자이자 최고의 박제사였으며, 다윈의 진화론을 증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 자신이 연구한 새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새를 안고 있는 노인의 눈동자는 아이들에 못지않게 초롱초롱해 보이며, 얼굴을 덮은 주름에도 불구하고 표정도 아이처럼 천진해 보입니다. 굴드의 새에 대한 열정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속되어 온 것처럼 보입니다.
‘열정’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화가 중에서도 어딘가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의 대가 클로드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입니다. 모네는 1892~1893년 사이에 노르망디주 루앙에 있는 성당을 그렸는데, 30점 이상이라고 하네요.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구도로 똑같은 피사체를 그리면서 그가 열정을 가진 대상은 ‘빛’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대상에 부딪혀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와 망막에 맺히고 뇌가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강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데, 물체에 고유의 색이 있을까? 모네는 이를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시간, 대기의 상태, 습도 등을 반영한 저 연작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빛과 색채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이 지루한 대장정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열정’과 대응되는 동사를 찾아보니, ‘쏟다’가 있었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려면 자신 안의 에너지를 그 대상에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러지다’라는 동사와도 많이 대응되었습니다. 쏟아붓던 에너지가 다하고 나면 열정은 스러지는 거죠. 그래서 열정은 ‘젊음’의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나 봅니다. 쏟을 에너지가 넘치는 젊음이 열정의 원천이 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본 존 굴드는요? 모네가 루앙 대성당 연작을 그린 나이도 만 52~53세 정도이니, 젊음과 열정이 완전히 대응된다 볼 수 없을 듯하네요. 열정이 스러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하는 장작 같은 역할은 무엇이 할까요? 신념, 의지, 지구력, 성실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열정과 반대되는 것 같은 덕목들이죠?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도 나를 사랑하기까지, 그리고 함께 사랑하기 위해 아픔도 슬픔도 극복해 나가는 것처럼, 좋아하는 것에 열중하려면 장애물을 견뎌 내는 저러한 덕목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무언가를 향한 열정에 장애물을 걷어 내고 강인하게 열정을 불태울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은 늙지 않고 젊을 것이며, 내면을 차곡차곡 다져 나가고, 열정을 젊은 날의 치기로 치부하지 않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든 그 열정을 후회 없이 성취의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방송되었던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두 그림 중에 진짜 작품을 고르는 미션이 있었습니다. 저, 틀렸어요. 흑. 나름 열정적으로 미술 작품들을 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제 열정은 심미안을 기르기에 한참 모자랐나 봐요. 좀 더 성실하게 미술을 대해서, 저의 열정이 재가 되어 스러져 버리지 않게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