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다행
안녕하세요? 저는 지하철 역무원입니다. 그래서 주말이나 공휴일 상관없이 나흘 주기로 주/야간 교대근무를 합니다. 이런 근무 형태라 보통 직장인들처럼 평일 고정된 시간대에 무언가를 꾸준히 해나가기에는 어려운 여건입니다. 또한, 언젠가 결혼을 하여(가능하다면) 아내와 아이를 밤에 홀로 두고 야간 근무를 하러 가게 되면 걱정될 거 같습니다.
네? 조금만 살아보면 알게 될 거라고요?! 하지만, 스페인 인상주의 화가인 호아킨 소로야(JOAQUÍN SOROLLA, 1863 – 1923, 스페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따뜻한 가족의 모습을 보며 생각해보면 지금 마음은 그렇습니다. 지금은 말이에요.
이처럼 보통 직장인들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을 갖긴 어렵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칼퇴근'(이라고 썼지만, '정시 퇴근'이라고 외치자!)을 한다는 겁니다. 아,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 예전 직장에서 영업 관리를 할 때는 별을 보고 출근하고, 달을 보며 퇴근했거든요.
또한, 평일 낮에도 개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직장에서 저녁(밤)에 퇴근할 때는 술의 유혹이 술술 땅겼었죠. 하지만 지금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여유가 생기니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전시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다가 지금처럼 미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미술을 좋아했을까요? 아니요. 학창 시절에 미술 성적은 보통 '양' 정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창 성인이 되어서도 저와는 상관없는 세계였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의 고상한 세계라고 여겼거든요. 그랬던 곳이지만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좋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도 이런저런 전시와 강연을 즐기고, 미술 관련 공부를 꾸준히 하며, 해외에 가게 되면 미술관 투어를 중심에 놓고 코스를 짜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집에는 이런저런 작품도 걸려있답니다.
그렇다면 왜 다 커서 미술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뭐라고!). 아마 미술과 함께하면 기분 좋아서?? 단지 이것 때문일 거예요. 제가 그 이유를 잘 모르는 건 분석할 필요가 없을 만큼 좋아서 일 거예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도 하나하나 따져보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건 글 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므로 이번 기회에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 가지 키워드가 잡히더군요. 하나는 '안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정'입니다. 먼저 ‘안정’부터 볼까요? 처음엔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 – 1919, 프랑스)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서, 언젠가부터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 – 1926, 프랑스)의 목가적인 작품으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호아킨 소로야의 느긋하면서 포근한 그림이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 -1903, 프랑스)의 19세기 유럽 거리를 보게 되면 그 안으로 빠져들며 명상에 잠깁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실내보다는 유럽풍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멍 때리는’ 것이 좋더라고요. ‘이 시국’에도 그리 나쁘지 않은 취미죠?
이번엔 ‘인정’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예전에 아트북살롱 멤버들과 함께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렸던 '픽처 플레인(Picture Plane)' 전을 함께했을 때의 일입니다. 멤버들과 따로 또 같이 '선(Line)'의 강렬함을 느끼며 이것저것 감상하다가 프랑수아 모렐레(François Morellet, 1926 - 2016, 프랑스)의 <우연히 그은 10개의 선>이라는 작품 앞에 모두 ‘우연히’ 모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봤을 땐 그냥 단순하게 선이 그어진 모습이라 관심이 안 갔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접한 다른 멤버들은 깊은 탐구와 토론을 하더라고요. 아크릴 물감으로 곧게 뻗은 선을 그린 작품인데, 이게 너무나 정교해서 비법이 무엇일까 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스킹 테이프를 썼겠죠?", "검정이랑 하양 중 어느 것을 먼저 칠했을까요?", "캔버스를 떼어 내서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요."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또한, 제목에는 '우연'이란 말이 들어가 있지만, 정말 심혈을 기울인 느낌이 들어서 마치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건네며 "오다 주웠다!"라고 하는 것 같다는 감상평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을 놓고도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이 기분 좋고 유익했습니다. 보통 정치나 사회 문제를 놓고는 언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미술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마음도 차분해지면서(괜히), 상대방의 이야기에 더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짐을 느꼈습니다. 작품뿐만 아니라 사람을 바라볼 때도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더욱 존중하고 그 개성을 ‘인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평안과 정서적인 가르침을 주기에 미술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앞으로도 같은 마음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은 ‘미알못’으로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리 걱정하지도 않을 거예요. 당장은 지금처럼 미술을 사랑하며 오래 함께할 겁니다. 그리고 혼자보다는 다 같이 말이에요!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미술을 부담 없이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