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히햐
제가 기억하는 처음중 가장 설레는 처음이 있습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짝꿍과 처음 만난 날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상이라고는 직업, 나이, 휴대폰 연락처만 알고 있는 채로 강남역 사거리의 일명 만남의 장소에서 수많은 인파 속의 한 명으로 만나게 되었죠. 우린 서로가 상상하던 그런 외모는 아니어서 너무 어색해하였지만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눈 우리는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이라도 찾은 듯 자석처럼 끌렸습니다. 확신과 의심 사이를 오가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이제 서로가 아니면 앞으로의 인생에서 더 이상 사랑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떠밀려 첫 만남이 있던 그해 겨울, 두 눈에 콩깍지를 채 벗기지 못한 채 그만 결혼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살아오면서 우리의 사랑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손이라도 스치면 찌릿한 전기가 오고 눈이 마주치면 불꽃이 튀는 것만이 사랑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기와 환경에 따라 여러 테마로 변주되는 것 같습니다. 부부의 모습을 그린 미술 작품들 속에서 저마다 다른 사랑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죠.
리카르드 베르그(1858 ~ 1919)의 <북유럽의 여름 저녁> 속 남녀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첫 만남의 풍경과 겹쳐지기도 하네요. 그림 속 남녀는 해 질 녘의 풍경을 바라보며 밀당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멋지게 보이고 싶은지 남자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올리고 있지만 편안해 보이지만은 않네요. 여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몸이 살짝 뒤로 젖히고 있는데 우아한 기품과 도도함이 함께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한 곳을 응시하면서 침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서로를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는 1년간 서로에게 존대를 하며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더랬죠.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자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내 전부를 보였을 때 남게 될 허무함이 두려웠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와 형식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부가 되고 난 후 이 거리감은 참 조절하기 어려워지더군요. 연애 기간이 짧았던 우리는 결혼 후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프레더릭 레이턴(1830~1896)의 <화가의 신혼>에서의 살포시 뺨과 손을 겹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된 듯 너무나 행복해 보이기만 합니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옷처럼 부부의 얼굴도 빛나고 있네요.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던 레이턴이 생각하는 결혼은 아마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미혼이 가지고 있을 법한 결혼에 대한 판타지가 반영된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 현실의 결혼 생활은 매일 이럴 수는 없으니까요. 부부는 함께 생활하지만 다른 경험과 취향을 가진 존재였고 그렇기에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론 손톱과 발톱을 있는 대로 드러내며 치열하게 싸우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지난날을 전쟁으로 비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때의 치열함은 서로 다른 영혼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부지발의 무도회>에서 보면 남녀는 함께 춤을 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고 있죠. 남자의 한 손은 여자의 손을, 나머지 한 손은 허리를 잡고 자신 쪽으로 강하게 밀착하고 있고, 시선도 그녀의 얼굴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인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 또한 이렇게 시선이 엇갈린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러한 채로 서로를 견뎌 주었고 계속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젠 음악과 상대의 스텝에 집중해야만 이 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서로의 발을 밟거나 과한 동작으로 난처하게 하는 일 또한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또 다른 사랑의 관계로 변주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난 늦은 밤의 모습을 그린 스웨덴의 화가인 칼 칼르손(1853~1919)의 그림 속 풍경은 오늘 우리의 삶과 너무나 비슷해서 웃음이 나네요. 슬하에 5명의 자녀를 키웠던 칼 라르손은 밤이 되어야 부부 자신들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칼 라르손은 빈민촌에서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폭언을 들으며 자라났지만 유년 시절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족을 지극히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과 아이들의 행복한 일상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고 부인과 함께 그들의 보금자리의 가구와 소품들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많은 화보집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서는 당연히 아이들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두 부부가 무엇을 함께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과는 대조적으로 공간을 밝히고 있는 램프의 불빛은 이 가정의 다정하고 따스한 공기를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 또한 아이들을 재운 후 이불속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맥주 한 캔을 기울이며 오늘 하루의 삶에 대해 나누곤 하지요. 늦은 저녁 아이들이 빠진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의 끝에서 그 언젠가 우리가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봅니다.
가을에 사과가 익어 가듯 우리의 수많은 시간을 지나 우리의 인생도 익어 가겠겠죠. 앙리 마르탱(1860~1943)의 <사과나무 아래서 산책하는 신부>의 그림처럼 뻣뻣하고 주름진 두 손을 꼭 잡고 연민이라는 콩깍지를 다시 끼운 채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의 작가인 앙리 마르탱은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부인 마리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여 50년을 해로하며 그들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많이 담았습니다. 생전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무명 화가가 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선물은 아마 그들의 사랑을 담은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사과 꽃 아래 걷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점묘법으로 하나하나 점을 찍어서 선과 면을 표현했는데요. 마치 그들이 지나온 많은 찰나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만 같네요.
사랑, 그 시작은 봄처럼 설레었지만 지금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익어가는 가을 어느 날 우리가 찍어 놓은 하나하나의 점들 사이로 함께 걸어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달콤하게 익은 사과 한입 깨어 물며 지난봄의 향기와 여름의 태양을 추억하고 있을 우리 사랑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