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의 된장국, 한 그릇의 위로

하루치의 따뜻함 01

by 전태영
<하루치의 따뜻함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2025년 여름, 퇴직을 앞둔 오후의 교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매일의 기록이 쌓여, 누군가의 하루에도 따뜻함이 번지길 바라며 앞으로도 ‘하루치의 따뜻함’을 천천히, 꾸준히 적어보려 합니다. 필요한 날, 이곳에서 작은 온기를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함께 들으면 좋은 오늘의 곡 - 효도합시다(정동원)


세월은 참 덧없이 흘러갔습니다. 어언 20여 년 전, 가을 저녁 무렵.
아들이 입원해있던 서울 병원을 갔다가 홀로 내려오던 그날,
마음은 무겁고 몸은 지쳐 밥 한 끼조차 목에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게 그렇게 서럽고 쓸쓸한 일인지, 그제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갈 곳 없는 마음을 안고 무작정 처갓집으로 향했습니다.


“전서방, 어서 오게.”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지?”

“아니예요, 어머님 저녁 좀 먹고 가려고 왔어요.”

“그려, 이렇게 오니까 얼마나 좋아. 내가 별로 솜씨는 없지만 된장국 한번 끓여 볼게.”


속마음엔 기대보다 죄송함이 더 컸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장모님은 아무 말 없이 고요히 부엌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구수한 된장국이 올라져 있는 밥상을 차려주셨지요.

된장 풀어 끓이신 국 한 그릇과, 소박한 반찬 몇 가지.

하지만 그 밥상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장모님의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밥숟가락을 들자 눈물이 먼저 고였습니다. 그날 저는 된장국의 뜨거운 국물보다 장모님의 따뜻한 마음에 더 깊이 데었습니다. 그 한 그릇의 국엔 외손주를 향한 애틋한 마음, 힘겨워하는 사위를 걱정하는 깊은 사랑,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 안다는 묵묵한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기억은 제 마음속에 언제나 따뜻한 빛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주말이면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관광지로 꽃구경도 다녔습니다. 계절 따라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걸으며 장모님의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고, 맛집에 모셔가 한 끼 대접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봄이면 문경새재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다녔습니다. 맑은 개울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숲속 새소리를 들으며 연둣빛 봄 풍경을 눈 가득 담았지요. 그 자리에서 삶에 대한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나누시던 두 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2남 4녀, 여섯 자녀를 두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보면 “이런 사위 또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셋째 사위인 저를 유난히 아끼시던 장모님의 그 따뜻한 사랑은, 지금도 마음 한켠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말씀에 저는 늘 마음이 든든했고,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칠순이 넘으신 후에도 두 분은 종종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아들딸 자랑도 하시고, 자식들 걱정이야 늘 있었지만 “크게 속 썩이지 않고 제각기 잘 살아줘서 고맙다”며 웃으시던 모습이 참 따뜻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마는, 자식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담긴 말씀이셨지요. 그 이후에도 주말이면 가족이 함께 어딘가로 떠나곤 했습니다. 여름이면 바닷바람 시원한 바닷가로, 가을이면 단풍 물든 산길로, 겨울이면 눈 덮인 숲속으로, 그렇게 계절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두 분과 함께 힐링하는 시간은 제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알기에, 자식 된 입장에서 아무리 잘해드려도 늘 부족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고, 더 자주 웃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일상이 오래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참 빠르게 흘러갔고, 이제 장모님께서는 구순을 넘기시고 기운 없이 누워 계십니다. 예전처럼 부엌을 오가며 국을 끓이시던 그 손길은 멈췄지만, 그 손이 제게 건네주신 따뜻한 정성과 사랑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제 마음속에, 제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날의 된장국처럼, 장모님의 마음이 제게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제가 장모님께 그 위로가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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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