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지게 주먹진 조그마한 손을 손목의 반동을 이용하여 왼쪽, 오른쪽 흔들어대던 딸아이. 마지막 구호는 '가위, 바위, 보'인데 그전에 뭐라고 하는지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시 그녀의 씩씩한 구호에 귀를 기울였다.
" 안 넘어진다, 가위, 바위, 보! "
그 소리에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안 넘어진다니, 그게 아니지 않아?
9년째 이어지는 베를린 살이에서는 새로운 인연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다.
우연히 나의 SNS가 소통의 통로가 되어 만나게 된 한 가정이 생겼다. 베를린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인 가정. 그 가정의 둘째 아이가 우리 아이와 동갑이라는 점 또한 감사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딸아이는 그 친구로부터 생전 처음 들어 본 가위바위보 구호를 배웠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정확한 내용을 모른 채 들리는 대로 읊어댔고, 결국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는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로 신박한 변신을 꾀했다.
가위바위보 게임은 이곳 베를린에서도 아이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행해지는 하나의 놀이이지만, 기원 자체는 고대 동양권이라 한다.1) 수학적 통계에 따른 이길 확률 같은 건 잘 모르겠고 남녀노소 누구나 특정 환경에 지배받지 않으면서도 간단하고 빠르게 승-패를 내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게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꽤 오랜 세월 동안 아무렇지 않게 가위, 바위 혹은 보자기를 내며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건만 아이의 입으로 나온 그 구호에는 이상하리만큼 단단함 혹은 묵직함이 있었다. 그렇게 '안 넘어진다'라는 한 문장은 며칠에 걸쳐 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시간이 꽤나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베를린 테겔 공항(2014년 당시 베를린의 국제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국제공항이라 하기엔 다소 초라한 낡은 공항. 그곳에 우리를 마중 나온 E는 남편이 일하게 될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성. 그는 하얀 얼굴에 연갈색 웨이브 진 머리카락, 콧등 위에 단정히 올려진 뿔테 안경, 자그마한 키와 왜소한 체격을 가진 독일 청년이었다. 상상 속의 게르만 족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나 할까.
공항을 나서자마자 날카롭고 서늘한 1월의 공기와 맞닥트렸다. 예고 없이 두 개의 콧구멍을 통해 쑥 들어온 차가운 밤바람은 몸 구석구석을 돌고 돌다 손가락 마디 끝까지 서늘한 기운을 전달했다. 분명 한국의 겨울밤공기와는 달랐다.
누구나에게 그렇겠지만 새로운 정착에는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들과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 법.
외국인청에서 체류 허가를 받는 것부터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리의 무지함으로 한 번, 직원의 실수로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고 세 번째 도전 만에 체류 허가를 받아냈다. 하지만 외국인청 공무원들의 쌀쌀한 말투와 표정은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나와 남편에겐 무척이나 가혹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만든 꽤나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출국 전 남편은 그 커뮤니티를 통해 두 사람이 머물 학생 기숙사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기숙사가 위치한 곳은 베를린에 이주한 터키인들이 주를 이룬 동네였고, 동네의 분위기는 꿈꿨던 유럽의 풍경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바닥에는 쓰레기며 담배꽁초들이 즐비하고 집채만 한 개들이 목줄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1월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눈보라가 치고 햇빛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종종 테겔 공항을 떠나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비행기의 꽁무니를 붙잡고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학생 기숙사로부터 기숙사를 곧 나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기존 세입자의 명의를 둔 채로 그 아래에 계약을 할 경우 6개월이 최대 거주 기간이란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제대로 갖춰진 집은, 돈 없고 신용도 불확실한 젊은 학생 신분의 부부에게 쉽사리 허용되지 않았다.
그밖에도 베를린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일주일 만에 지갑을 소매치기당하는 바람에 한국에서 가져온 주민등록증이며 은행카드와 얼마 되지 않는 현금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남편이 연애 중에 큰맘 먹고 사준 장지갑이었는데 그렇게 홀랑 사라져 버렸다. 지하철 티켓을 잘못 끊고 다니다가 벌금으로 40유로를 내기도 하고(2022년 기준, 60유로로 가격이 올랐다.) 남편은 결혼한 지 1년도 안되어 결혼반지를 잃어버렸다. 실컷 장을 다 보고는 계산대 위에 물건을 두고 집에 돌아왔다가 독일어로 설명하기 싫어서 물건을 포기한 적도 있고, 보도 옆에 있는 자전거 길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 자전거 도로 위를 걸어가다 별안간 전동 휠체어 위의 할머니께 호되게 야단맞은 적도 있다. 독일어가 배우기 싫어서 서럽게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그렇게 외로움과 고독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힘써 싸워낸 시간들이었다.
우왕 좌왕 흘려보냈던 베를린 생활 초기의 기억들을 되뇌어보면 나는 참 많이도 넘어지고 또 넘어졌었구나 싶다. 하지만 그때마다 완전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사람'이었다. 때론 '사람'때문에 넘어질 뻔했으나 다시 '사람'덕분에 일어났다. 기숙사에서 쫓겨나기 한 달 전 극적으로 구한 집. 그 집의 내부 벽 위 수많은 못 자국 들은 교회 청년들이 함께 막아주었고 틈틈이 우리 집에 와서 페인트칠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삿짐과 가구를 옮길 때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던 E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독일어 학원 3개월 차에 독일어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순간, 나를 토닥이며 한 번만 더 해보자고 격려해준 독일어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다. 몸이 아플 땐 내 손을 붙잡고 함께 병원에 가서 독일어로 이야기해주던 분도 있었고, 독일어로 해결해야 했던 어려운 서류 작업들을 도와주는 독일 친구도 생겼다. 누군가의 작은 도움들이 적시 적소에 찾아와 또 금세 넘어져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처량한 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9년의 세월 동안 나는 과연 눈에 띌만한 장족의 발전을 했는가?라는 질문엔 감히 'Yes'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오늘도 여전히 넘어지고 또 우는 한심한 모습이니 말이다.
그래도 넘어지고 넘어지다 굳은살이 배겼는지 예전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날 수 있는 탄성력이 붙었다. 그리고 혹시나 처참하게 넘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나의 넘어짐을 위해 울어주고 함께 기도해주었다. 물론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살아내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에 의해 철퍼덕 엎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어났고, 이젠 누군가를 일으켜 주기까지도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오전에도 여전히 나는 넘어졌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 오후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하루하루 전쟁 같은 시간 속에서 가위, 바위 혹은 보자기 중 아무거나 내자. 그냥 뭐라도 던지고 뭐라도 해보자.
포기하고 싶고 멈추고 싶고 때론 아무것도 하기 싫어도, 나를 일으켜준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또는 내가 일으켜 세운 누군가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뭐라도 던져보자.
이제껏 세상으로 내던진 무언가는 가끔 승리로, 이따금 패배로도 다가왔지만 아무것도 내지 않은 것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설령 대단한 포부로 내던진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삶은 완전히 망하지 않았다.(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따라서 인생은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일단 아무거나 내야 한다. 뭐라도 내야 한다. 뭐라도 내지 않으면 그것으로 일단 진다.
그리고 원한다면 끊임없이 도전해 볼만하다. 누군가가 힘껏 뜯어말리기 전까진. 인생은 그런 점에서 가위바위보와 닮았다.
'안내면 진다'의 의미를 조금 더 곱씹어 보았으나 사실 '안 넘어진다'라는 구호에 더 마음이 기운다. 설사 넘어져도 아주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포부같이 느껴진단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1) 나무 위키, 가위바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