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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MI Oct 13. 2022

욱 하지 말아 줘

우리 아이는 햇살 좋은 여름날 태어났다. 그래서 아이의 생일 파티를 열고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은 늘 쉽지 않았다. 여름 방학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아이들이 올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것이 관건. 특히 올해 여름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유치원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생일 파티였으므로 생일 파티에 대한 아이의 기대치는 높디 높아졌다. 고맙게도 열 명의 아이들이 와주었다. 다행히 누구 하나 다치거나 우는 일 없이 무사히 생일파티가 끝나가는가 했건만, 마지막에 A의 양말이 사라졌다. A도 자신이 어디에서 양말을 벗었는지 기억해 내지 못했고 결국 우리 딸아이의 양말을 A의 발에 신겨주었다. 그날 이후, 이 양말은 내 기억의 저 편으로 까맣게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나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웟츠앱으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A의 엄마였다. 내용인즉슨, 생일날 빌린 양말을 돌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같은 유치원 일 때는 수고롭지 않았던 일이, 학교가 달라지고 만나기가 어려워지자 조금은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 양말은 그냥 가지라고 할까 하려다가도 헌 양말을 주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 고민이 되던 차에 고맙게도 A의 엄마는 우리 딸을 자기네 집으로 초대해주었다. A의 집은 아이의 초등학교와 걸어서 7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모든 과정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아이를 A의 집에 보내고 두 시간 뒤에 아이를 데리러 오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난 오후 6시에 내가 나타났을 때, 역시나 아이는 집에 가기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친구 집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조금만 더 놀면 안 되냐고 하도 졸라서 5분만 더 노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30분이 되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세월아 네월아 유치원 가던 시절은 끝났건만. 새벽 6시 45분에 일어나 빠릿빠릿 준비해도 겨우 도착하는 학교인데.(수업이 8시에 시작함) 빨리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씻고 자야 한다는 압박감에 내 속은 점점 타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점점 A의 엄마 눈치가 보였다. 나 또한 조금만 더 지체하면 분노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근조근히 타이르기에 성공하여 겨우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기 위해 다섯 걸음쯤 옮겼을까.

" 엄마 나 화장실. "

그 한 마디에 그만 지금껏 꾹꾹 눌려놓은 무언가가 펑 터지고 말았다.

" 아까 놀기 전에 집에서 나올 때 화장실 안 가고 뭐했어? 엄마가 지금 30분 넘게 기다린 거 몰라? 화장실 가고 싶은 건 참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

길 한 복판에서 결국 앙칼진 목소리로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의 감정에 충실하며 냉전 상태로 버스를 탔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했던 대로 저녁 식사 시각이 늦어졌다.

돌아오자마자 아이를 대충이라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저녁 준비를 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 길 한 복판에서 아이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버린 나의 태도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 조금만 참을걸. 왜 그렇게 못했을까. ' 혼자 나지막이 읊조리며 한숨을 쉬었다.

퇴근이 늦어지는 아빠를 기다릴 수가 없어 아이와 나, 단 둘이서 식탁 앞에 자리했다. 몇 숟가락을 떴을까. 내가 먼저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 아까 엄마가 갑자기 소리 질러서 미안해. 네가 엄마랑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아까 너무 화가 났었나 봐. 그리고 엄마가 많이 기다려줬는데도 계속 더 놀겠다고 하는 너의 모습에 너무 화가 났었어. 그래도 화내면 안 됐는데 미안해. "

그러자 아이도 입을 열었다.

" 괜찮아. 그리고 나도 자꾸 더 있겠다 하고 화장실도 미리 안 가서 미안해. "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았건만 기분이 썩 개운하진 않았다. 왜 이런 안 좋은 감정은 순식간에 연쇄적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한마디 툭 던졌던 것 같다.

"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

나의 제법 큰 혼잣말에 밥을 먹다 말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 엄마, 화내는 건 괜찮아. 근데 욱하지 말아 줘. 화를 차라리 나눠서 내는 게 나아. 화를 참지 마. (두 주먹을 쥐며) 이렇게 두 번 화가 났다고 생각해보면, 한 번은 화를 내고 한 번은 참잖아? 그럼 나중에 참은 쪽 (감정)이 더 커져서 화가 더 커진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 데리러 오기 전까지 화난 게 있으면 나 안 보는데서 다 풀고 와줘. "

일리가 있었다. 아이를 만나기 전에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있을 때 별거 아닌 아이의 행동까지도 한층 더 심기에 거슬렸다. 그날도 아이가 A의 집에서 노는 동안, 수술을 앞둔 지인의 병문안을 잠시 다녀왔는데 걱정과 안타까움과 답답합이 한데 얽히고설켜 마음이 심란했었다. 그런 마음이 결국 욱함으로 표출되었구나. 싶었다. 아이의 설명은, 문장과 문장 사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풀라는 것. 제발 욱 하지 말라는 것.

" 근데 만일 너 데리러 가기 전까지 화를 다 내서 괜찮다가도 네가 떼쓰고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아까처럼 화가 불끈불끈 나면 어떡해? "

이 순간만큼은 엄마와 딸의 대화가 아니라 내담자와 상담자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 화가 나면 먼저 속으로 화를 내봐. 표정은 막 찌그러지고 화가 나도 되는데 말은 하지 마. 속으로 그 화난 말들을 다 해. 그리고 만일 화를 내고 싶으면 그냥 목소리로 얘기해.

화난 목소리 말고, 착한 목소리로. "

" 그럼 화났을 때, 표정이 안 좋은 건 괜찮은데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

" 응.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 나도 너무 무섭고 나도 같이 화가 나. "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의 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니 나의 욱함에 대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고마워.하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는 신나게 저녁식사를 해치우고는 자기 전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해 자기 방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부정적인 감정을 제 때 올바르게 푸는 것은 참 어렵다.

일차원 적인 감정들도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진 지 헷갈리는 복잡한 감정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 실타래의 끝을 찾기 포기하고 둥글려 아무 데나 방치해버리면, 엉뚱한 순간에 욱 함이 올라온다. 그리고 '욱'이 향하는 방향이 보통 내 삶에서 가장 편한 사람 혹은 약한 사람인 것이 문제이다. 종종 마음의 여유도 없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힘든 감정들을 '공감'이라는 명분으로 얻어온다. 혹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러면 정리되지 못한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이 어느새 마음속에 들어차기 시작하고 긴장모드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의 덩어리들이 쌓이고 쌓여 마음 용량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뭐 하나만 걸려라'의 심정이 된다. 돌이켜보니 나의 '욱'은 대외적 이미지에 최소한의 손상을 입히면서도 쉽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본능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이런 공격적인 감정이 불같이 향한 곳은,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다. 그중에서도 어리고 약한 아이였던 것 같다. 이처럼 개인적인 '욱'이라는 감정이 엉뚱한 대상을 향해 달려갈 때,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묻지 마 범죄 등의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이는 유전적 기질로 인해,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욱'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기도 하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기도 하고.

이제껏 이 감정들을 방치하거나, 꾹꾹 눌러 참거나 또는 취미활동이나 여가를 즐기면서 풀어보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잘 풀리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식탁 앞에서 아이와의 짧았던 대화에는 묵직한 한 방이 있었다.


최근 나는 일자목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어깨 근육이 잘 뭉치고, 단단해진 어깨 근육이 오른쪽 팔 신경을 눌러 팔 저림이 시작된다. 안타깝게도 글을 쓰다 보면 어깨 근육이 종종 뭉친다. 만일 근육이 뭉치려는 기분이 들 때 그 느낌을 무시하고 제대로 풀어 주지 않으면 며칠 내 어김없이 팔 저림이 생긴다.

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뭔가 좋지 않은 감정들이 뭉치려는 기분이 든다면 그 즉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 감정을 정리해야 한다. 먼저는 이 감정이 대체 어떤 감정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감정이 일어나게 된 외부 자극이나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뭉친 어깨를 마사지 볼로 살살 풀어내듯, 뭉친 감정도 살살 풀어헤쳐야 한다. 작은 감정의 뭉침일수록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실마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감정의 처음에 서면 뭐라도 해결이 된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게 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계획하게 된다.

화를 쪼개자. 할 수 있는 만큼 작게 쪼개 보자. 작은 모래알로 으스러진 화를 아무도 보지 못할 먼 곳으로 가뿐히 흩어버리는 완벽한 결말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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