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MI Oct 14. 2022

한 번 생각해볼게

아이는 올해 8월 말 초등학생이 되었다. 베를린에서는 만 6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갈 자격이 생긴다. 만일 학교 입학일 기준으로 아이의 생일이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은 경우를 감안한다면 어림잡아 만 5세부터 만 7세까지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셈이다.


뭘 할 수나 있을까 싶은 자그마한 아이들이 옹기종이 교실에 모여 수업을 들을 생각을 하면 상상만으로도 귀엽고 대견했다. 대한민국 정규 교육과정을 밟은 사람으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베를린의 학교생활은 늘 궁금하고 관심이 갔다. 특히 나에게 중요한 테마는 '친구'였다. 아이는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이었다. 혹여나 인종 차별적인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혹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힘들어할까 봐 실은 내내 마음이 쓰였다.

저녁을 먹는 동안 아이는 그날 학교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같이 앉게 된 짝꿍인 E애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이의 짝꿍은 남자아이이고 꽤나 개구쟁이란다. 최근에 E가 학교에 가져온 애착 인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손목엔 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스마트워치를 차고 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그럼 짝꿍이랑 이제 친구 했어? "

나의 질문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딸.

" 짝꿍이 먼저 나한테 친구 하자고 했는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

" 뭐라고 했는데? "

" 한 번 생각해볼게. 라고 했어. "

그 말이 답지 않게 도도해 보여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짝꿍이 먼저 친구 하자고 했으면 친구 하면 되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

그러자 아이는 기가 찬다는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 엄마. 내가 지금까지 남자애랑 친구 한 적 있어? 친구가 된다는 건 같이 놀고 그러는 거야. E는 그리고 맨날 내가 뭐만 하면 선생님한테 다 얘기해.

   그게 나는 기분이 안 좋아. 하지 말라고 해도 해. 그래서 아직 친구는 아니야. "

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 그래도 나중에 짝꿍이 더 이상 기분 나쁘게 안 하면 친구 하는 건 어때? "

아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대답 대신 손에 쥔 숟가락을 국그릇 쪽으로 가져갔다.



나의 초등학교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메워지지 않은 마음속 구멍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왕따가 되어버렸다. 돌이켜보면 그 해는 유난히 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성적을 기준으로 반장 후보를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붐이 일어 오롯이 인기투표로 반장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장이 된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여자 아이는 유머러스했고 말을 잘했다. 물론 욕설도 서슴지 않았기에 십 대 또래 아이들에게는 남녀 상관없이 꽤나 인기가 많았다. 자연스레 반장을 필두로 주변에 네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이 그룹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나를 타깃으로 삼고 따돌리기 시작했다. 그 후, 교실 속 아이들은 왕따 시키는 자들과 방관하는 자들 이렇게 크게 두 분류로 나뉘었다.

필름이 끊어진 듯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따돌림을 당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반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과의 사이가 (정확히는 반장과 담임 선생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장과 담임 선생님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웠던 장면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장은 담임 선생님이 나를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몹시 억울했다.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부러 노력한 적도 없을뿐더러, 선생님이 나만 특별히 예뻐한다고 느낀 적 또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 번쯤 목소리를 내봤으면 좋았을 텐데 끝내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부모님이나 담임 선생님께(왕따 사건에 연루된)  말씀드렸다가는 일이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에 그 모든 두려움, 상처, 절망과 자책감을 혼자 오롯이 품고 말았다. 그저 조금만 더 참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내가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책상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욕설과 비아냥 거리는 소리들을 내 귀를 향해 쏟아냈다. 당시 인기 있던 남자애들과는 말도 섞지 못하게 했고 늘 혼자 점심을 먹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일종의 가스 라이팅이 아니었나 싶다.

이 악몽 같던 시간은 결국, 방과 후 청소시간에 정점을 찍고 말았다.

웬일로 방긋 웃으며 다가온 반장은 나에게 청소 용구함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시켰고 나는 조용히 청소 용구함으로 걸어갔다. 청소 용구함은 나무로 짜인 상자 형태였고 나는 물건을 꺼내기 위해 용구함 안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청소 용구함 안으로 힘껏 밀었다. '쿵!' 그리고 청소 용구함 문이 닫혔다. '갇혔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온 몸이 공포감에 휩싸였다. 열심히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두드리던 중 잠겼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나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던 반장의 얼굴과 웃음소리, 주변 아이들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무섭고 슬프고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며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던 것 같다. 그리고 스탠드에 앉아서 펑펑 울었던 것도 같다. 거기까지가 이 말도 안 되는 트라우마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 이후의 학교생활은 어땠더라?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들이 왕따 시키기를 관뒀었는지 아니면 내가 마음의 문을 완전히 잠가버렸는지도 도통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이후의 학창 시절에서 또 왕따를 당한 적은 없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속으로 삭인 어마어마한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나의 목소리, 나의 생각, 나의 호불호를 모두 잃어버렸다. 모든 관계를 수동적으로 맺기 시작했다. 다가와 주는 이들은 마음 다해 환영하고 친해지고 싶은 이들에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평등한 친구관계가 아니라 알게 모르게 주종 관계를 자초했다. 나는 친구라 관계 맺은 이들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했고 그들이 내게 화를 내면 무조건 미안해야만 했다. 친구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안절부절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나의 사정과 상황을 모두 버리면서까지 친구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결국 상처로 돌아왔다. 친구의 기분이 곧 내 기분이 되어야 했기에 괴롭고 힘들었다. 친구가 원한다면 하기 싫은 일도 꾹꾹 참아가면서 함께하고, 행복해하는 친구를 위해 행복한 척을 하는 내가 답답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부정적인 마음조차도 죄책감이 들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고등학교까지 인맥들의 다수가 '친구'라는 목록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나의 모습을 구축해나갔다. 어둡고 답답하고 소심한 사람이 아닌 밝고 쾌활하고 자신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동갑 여자아이들 앞에만 서면 초등학교 5학년의 내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소위 인싸로 불리던 아이들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절망스러웠다.

그 후, 본의 아니게 일 년을 휴학하게 되면서 나는 인생 처음으로 한 살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친구 맺는 기회를 얻었다. 고작 한 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서는 나의 본모습이 나왔다. 뜻밖이었다. 내가 즐거울 때 웃고, 싫은 것은 표현했다. 여전히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법은 서툴렀지만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회생활을 거치며 다양한 관계들을 맺기 시작했다.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가도 때론 실패하고 때론 넘어졌다. 끝없는 자책과 원망의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어느덧, 초등학교 5학년의 나는 상상도 못 했을 축복 같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지금도 건강한 관계 맺기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누군가와 반대되는 의견을 자신 있게 얘기하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데, 사실 팔 할은 말하기를 포기한다. 누군가의 말로 기분이 나쁠 때도, 적어도 그 앞에서는 그냥 웃어넘겨버린다. 절대 티 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다른 이의 부탁을 거절할 때 조차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또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두려워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꽁꽁 숨기게 된다.

그런 나이기에, 아이의 태도는 굉장한 센세이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친구 요청을 보류하는 용기라니. 어찌 보면 짝꿍 민망하게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알고 표현하는 훈련은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특히 '네', '아니오'가 분명한 독일 사회에서는 스스로의 의견이 분명한 것이 오히려 예의이며 남을 위한 배려가 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라 그런지 몰라도, 거절을 당한 당사자도 놀라우리만큼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일주일 후, 혹시나 해서 아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 짝꿍이랑은 이제 친구 하기로 했어? "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 음. 아직 생각 중이야. 근데 사실 까먹었었어.(키득) "

아이는 참 단순하구나 싶어 나도 같이 웃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 마음에 우리 아이가 모든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친구로 지내면 좋겠다는 욕심이 불끈 솟아올랐지만 이내 그 마음조차 내려놓았다.

절대로 쿨(Cool)함을 가장한 직설화법을 선호하진 않는다. 본인만 쿨하면 무슨 소용인가? 듣는 이들이 받을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뱉어내는 것도 건강한 관계 맺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과 오해가 있다면 당당히 말로 풀어야 한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것은 옛말이 아니다. 다시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를 종종 상상하곤 한다. 반장의 입에서 욕설과 조롱이 쏟아져 나올 때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는 내가 아니라 의자를 밀고 일어나 당당히 반장을 쳐다봤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냐고 똑똑히 물어봤다면 어땠을까? 언성이 높아지더라도 끝까지 내 생각을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당장 착하고 모범적인 학생의 타이틀은 내려놓게 됐을지는 몰라도, 내가 나를 지키는 법이 무엇인지는 배웠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나의 첫 단추는 어그적 끼워졌지만 인생의 단추는 셀 수 없이 많으니, 중간 어디부터 다시 잡고 새로이 단추를 끼워보기로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