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MI Oct 14. 2022

무서운 게 아니라 설레는 거지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리고 처음 시작하는 것에 대한 반응은 분명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또는 예기치 못한 일들을 마주할 때의 감정은 무척이나 다양하니 말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첫 시작에서 느끼는 긍정적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태도로 첫 발을 내딛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우리 딸아이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한국 부모 밑에 태어나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유치원에 입학했다.  작고 무해한 생명체는 어느  갑자기, 외계어 같은 독일어만을 사용하는 집단에 투입되어 혹한 적응기에 들어서 버렸다. 보통의 독일 아이들이 일주일 내지  주일이면 끝나는 적응 기간이었으나 우리 아이는  달이 걸려서야 엄마와  시간 정도 떨어지는  성공했다. 처음엔 나도 많이 울었다. 유치원 입구 쪽에 마련된 공간에 앉아 기다리면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아이와 같이 울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울고, 괜한 짓을 하는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울었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거의   내내 같이 울고 울었다. 그랬던 꼬마 아이가 어느새 부쩍 자라서 초등학교를 가게 된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토요일에 입학식을  잘 마치고, 이틀 뒤인 월요일이 아이의 첫 등교날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처음 보낼 때는 마음이 그렇게 아리고 힘들더니 초등학교에 보낼 때가 되니 생각보다 담담했다. 일요일 저녁, 첫날 입을 옷과 가져갈 책가방을 미리 준비해두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아이는 눈알을 뒹구르르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 엄마, 나 좀 무서워. "

학교 첫 날을 앞둔 딸의 심정이었다. 하긴. 아직도 콩알만 한 아이가 제 몸 만한 크기의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울까 싶었다.

" 맞아, 엄마도 옛날에 학교 처음 갈 때 겁났던 것 같아. 근데 지금 너의 마음은 무서운 게 아니고 설레는 걸 거야. "

" 설레는 게 뭔데? "

" 설레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기대되고 신나고 떨리는 기분이야. "

" 그럼 나는 지금 설레는 것 같아. "

다음날, 아이는 기대 이상으로 첫 등교를 씩씩하게 잘 해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엄마 품에 안겨 우는 아이들도 있었기에 씩씩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화요일 저녁, 첫 학부모 모임날이 찾아왔다.

핸드폰 캘린더에 저장하면서도 조금은 늦게 찾아오길 바랐던 학부모 모임 날. 유치원 때부터 분기별로 참여했던 학부모 모임은 몇 년이 흘러도 이렇게 적응이 되지 않는 건지.

두 시간여 동안 독일어를 사용하여 듣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학부모들을 만나고 그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한국이었다면 이 정도로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독일어 실력이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애매한 나에게 이런 자리는 늘 가시방석이다. 그 전날부터 어찌나 긴장이 되는지 도무지 어떤 일에도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학부모 모임 당일 오후,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갔다. 아이를 픽업하는 시각을 기준으로 약 3시간 후면 학부모 모임이 시작될 터였다. 집에 오는 길,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꼼지락 거리며 쪼그라들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 오늘 저녁엔 아빠랑 있어. 엄만 오늘 엄마 아빠들 모임 하러 너희 학교에 갈 거야. "

" 응 알았어. 엄마. "

" 근데 사실 엄마는 거기 가는 게 좀 무서워. "

제멋대로 튀어나온 나의 본심을 듣고 아이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엄마,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설레는 거지. "

몇 주전에 내가 아이에게 해 준 말이었다. 등교 첫날을 앞두고 한껏 긴장했던 아이에게 해 준 말 말이다. 갑자기 내가 아이가 되고 아이가 엄마가 되었다. 동시에, 설레는 마음을 먹고 첫 등교를 멋지게 해냈던 그날의 아이가 떠올랐다. 무척 밝고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이.

순간 마음을 바꿔먹어야겠다 결심했다. 계속해서 머릿속엔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들이 조각처럼 떠다녔지만 용기를 내서 소리 내어 내뱉었다.

" 맞아. 엄마는 무서운 게 아니라 설레는 거야. "



조금은 쌀쌀한 가을 저녁, 나는 어느덧 아이의 교실에 도착했다.

작은 교실엔 이미 도착한 학부모들로 가득했다. 그곳엔 아이들의 키에 맞춘 앙증맞은 책상과 의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었고, 몸집 큰 어른들이 각각 제 아이의 자리를 찾아 다소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미니어처 가구에 몸을 구겨 넣은 어른들의 모습처럼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졌고 그 덕분인지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 아이의 자리는 오른쪽 맨 앞줄에 위치해 있었고, 먼저 와서 앉아있던 짝꿍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의 짝꿍인 E의 어머니는 젊고 활기찬 분이었다. 나의 짧은 질문에도 친절하고 자세하게 대답해 주는 유쾌한 그녀의 분위기가 굳어있던 나의 마음을 달래는 기분이 들었다.


정해진 시각이 되자 담임 선생님이 앞으로 나오셨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첫 번째 학부모 모임이 시작되었다.  먼저는 아이들의 반을 맡고 있는 또 다른 보육 선생님과 인턴 선생님의 소개가 있었다. 그 후,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과목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고,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생활 루틴과 규율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열정적인 3명의 학부모가 학부모 대표로 뽑혔고, 남은 한 학기에 대한 전체적인 학교 행사 일정과 방과 후 활동에 관한 내용 전달을 끝으로 첫 학부모 모임이 무사히 끝났다.

두 시간 동안 초 집중모드로 독일어에 귀를 기울였던 나는 모임이 끝나자마자 진심을 다해 박수를 쳤다.

중요한 정보들을 놓치지 않았는가? 네

독일어의 70퍼센트 이상은 알아들었는가? 네

그렇다면 오늘의 목표치는 달성된 상황이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부랴부랴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었는데, 무슨 이유 엔지 다들 교실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일정은 마쳤고 다 같이 박수까지 쳤는데 왜 모두 교실에 머물러 있는 건지 몰라 속이 너무 답답했다. 눈치 게임을 하듯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던 중, 한 아버님이 교실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래, 1등으로 나가기는 좀 그러니까 두 번째로 슬슬 나가보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만 작게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기엔 충분했다. 당찬 걸음으로 학교 문을 나설 때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후회와 미련이 물밀듯 밀려왔다.

초등학교의 학부모 모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일찍 나온 것은 아닐지. 선생님께 한 마디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나온 것은 괜찮은 것일지.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다시 교실로 들어가기엔 이상하기도 했다. 만일 다시 교실에 돌아간다 해도 다른 학부모들에겐  어떤 말로 다가가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머릿속이 심히 복잡해졌다. 마음은 그렇게 속수무책 휘몰아치는데 나의 발은 계속해서 지하철 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몸과 생각이 따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결국 학교로 돌아가긴 틀렸다 싶어 부랴부랴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  잘 다녀왔어? "

남편의 질문에 " 응...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다른 학부모들보다 일찍 교실을 나선 것이 실은 마음이 불편하다고 설명했다.

" 그래도 전달 사항은 다 알아들었다며? 그럼 진짜 잘했네! 학부모 모임은 오늘이 처음이었잖아. 앞으로 계속할 테니까 그땐 좀 더 있다와. "

그제야 한껏 움츠렸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세월이 꽤나 흘렀건만, 아직까지도 독일인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생각해 보면 그리 큰 일도 아닌데 말이다. 경험상,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이제껏 누구도 나에게 언어적인 부족함을 함부로 지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와주기에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자격지심과 누군가에게 무시당할까 봐 지레 겁먹은 나의 방어적인 태도들은 유독 '처음'이라는 자리에 취약했다.



'처음'을 맞이하기 전엔 늘 두려움과 설렘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 두 감정은 한 끝 차이로 극명하게 나뉜다. 우선 나의 부족한 경험치나 성에 차지 않는 능력치에 집중할 땐 한 없이 두려워지다가도,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과 다양한 과정을 통해 맛볼 성취감을 기대하면 한 없이 설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려움과 설렘의 뿌리는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의 첫 학부모 모임은 누군가에게는 하찮게 느껴질 하나의 이벤트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예측 불가했던 일들과 감정들 때문에 혼란스러운 순간도 존재했지만, '설렘'을 안고 시작한 처음이기에 결국 뿌듯한 기억으로 가슴속에 남았다.

이렇듯 첫 순간의 느낌은 온몸 곳곳에 남아 잘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어떤 일에서든지 딱 한 번만 주어지는 '처음'이라는 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일의 경중에 상관없이 지금 만일 '첫 출발선'위에 서 있다면 이왕에 두려움보다 설렘을 골라보자. 설렘을 안고 내디딘 첫걸음은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울 테니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