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에서
고1 무렵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다.
모든 내용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선물 받은 난초를 툇마루에 두고 외출하신 내내 난초가 강한 햇빛에 어찌 될지 그 걱정에 시달리셨고 고로 고통과 번민은 난초를 가진 '소유'에서 오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셨다. 그러므로 번민이나 고통을 없애려면 무소유를 지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스님의 경험을 예로 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였기에 줏대 없던 고등학생에겐 꽤 근사한 철학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백지상태였으니 더욱 그랬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면서 무소유가 내 삶의 지향점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두어 번쯤은 경제적 부자유 즉 경제적 불편을 ‘무소유의 철학을 가진 멋진 자’로 포장하듯 말한 적은 있다. 당연히 상대도 알고 나 스스로도 잘 아는 비겁한 변명이었다.
입적하신 큰스님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
스님은 전세 대출 걱정도 없으셨을테고, 절에 계시니 정년이나 이직, 실직, 명예퇴직, 감원 등 직장 걱정도 없으셨을게다. 자본주의가 충만한 21세기 한국 땅에선 무소유가 아닌, 메뉴 이름보다 가격 쪽으로 먼저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있는,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내가 계산해야 말지를 속으로 번뇌하며 고민하지 않을 적정한 소유의 삶을 일러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속세에 절여진 생각을 해본다. 자애로운 큰스님은 이 불온한 생각을 자비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풀 소유를 했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았던 어떤 스님이 최근 컴백을 하셨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해 보인다. 사고를 친 연예인처럼 자숙의 의미로 한 두 해를 쉬었다가 컴백이라는 생뚱한 단어를 동행하여 이슈가 됐다. 비로소 멈춰서 무엇을 보셨을지 새삼 궁금하다.
불교를 폄훼하거나 트집 잡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유명하다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108배도 하고 일주문은 꼭 합장을 하고 지난다. 108배를 했던 유명한 절을 가만 따져보니 법주사, 불국사, 부석사, 용궁사, 선운사, 송광사, 해인사, 낙산사, 운문사, 통도사, 내소사 등이 떠오른다. 당연히 자본주의적 욕심이 그득한 마음을 품어서 절을 했던 것 같다.
빅소유를 하고 싶은 욕심과는 다르게 무소유를 넘어 빚소유에 수렴하는 현실에 잠시 생각이 들어서 끄적일 뿐이다.
하긴 적정의 소유라는 기준도 모호하긴 하다. 얼마를 가지게 되었건 나는 분명 더 가지고 싶어 했을 것임이 뻔하다. 그럼에도 적정한 소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날이 머지않은 시일 내에 꼭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