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데스밸리 사막의 능선에서
자전거로 전국을 떠돌아 여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저 낯선 먼 곳을 지향하며 마음의 변덕에 따라 방향을 잡아가며 돌아다녔다.
전라북도 정읍역 근처 골목의 작고 허름한 순댓국집에서 혼자 저녁 겸 반주를 하다가 주인 할머니에게 어느 길로 가야 좋을지 물은 적이 있다. 주인 할머니는 “내가 뭘 알어, 놀러도 못 가봤어”라며 일만 하다 늙은 자조 섞인 한탄만 돌려받았다.
그때 식당에는 나 말고 네댓 발짝 떨어진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김치 한 접시에 소주를 마시던 남루한 차림의 야윈 몸을 가진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뿐이었는데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거들었다.
“줄포를 가야지. 어스름 해 질 녘 갈대숲 노을을 봐야지.”
기차역에서 노숙을 할 것으로 보이는 알코올중독의 부랑자 같은 남자와 대화가 섞여서 좋을 것 없다는 순간의 판단으로 흘깃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술잔만 바라보며 있었는데 아랑곳없이 그는 시를 읊는 듯, 노래를 부르는 듯 말을 이었다.
“어여쁜 애인 손 살며시 부여잡고 집에 가기 싫은 사람마냥 터덜~터덜~ 게으르게 게으르게 걸어야지“
그 말소리에 번뜩 놀라 사내를 보았을 때, 술잔을 든 채 허공을 향한 그의 눈과 표정은 이미 줄포를 걷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내가 여행하는 내내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황홀한 것이었다.
나는 낭만 있게 홀로 전국을 방랑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큰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실로 부랑자로 여겼던 그가 낭만 속을 방랑하고 있고, 나는 일상을 부유하며 부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이튿날 차마 나는 줄포로 향하지 못했다. 감히 그의 겉모습만 보고 지레 판단했던 내가 우습고 부끄러웠던 것 같다. 도망치듯 전남 장성으로 향하는 곰재를 꾸역꾸역 자전거로 넘는 내내 가본 적 없는 줄포와 낭만적인 그 사내를 생각했다. 줄포로 향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그 멋진 갈대숲으로 들어가기가 겁이 났고, 갈대숲을 벗어나는 것은 더욱 겁이 났던 것도 같다.
찾아보니 방랑과 부랑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방랑放浪 [명사]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부랑浮浪 [명사]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다만 방랑에게는 사람들이 [낭만]이라는 근사한 날개를 몰래 달아준 듯하다. 이십 대 즈음부터 낭만을 외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낭만이 무엇인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기 아직도 방랑인 줄 착각하며 줄곧 부랑 중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