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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데 있다

제주 협재, 비오던 어느 날 어느 순간의 모살

by 숲속의조르바


충청북도 단양 외진 산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이 가득한 아주 특별한 서점이 있다.


아니 있었다.


영화 [내부자들]로 유명해진 새한서점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부터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얼마 전 친구와 강원도 정선의 만항재 상고대를 보러 간 김에 단양으로 차를 몰았다.


산골 작은 마을 뒤편의 외진 길에 차를 세우고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지도를 따라 산끝까지 걸어도 책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간 것인가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 달 전쯤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는 뉴스가 보였다. 그제야 쌓인 눈의 틈으로 타다 만 책들의 검은 무덤이 보였다. 주변에 키가 큰 나무들도 온통 검게 그을린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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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윤대녕 작가의 글귀가 생각났다.


어쩌면 모든 것이 한때 겨우 존재했다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즐겨가던 작은 식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갔는데 그 집이 사라져 버려 서운한 마음을 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 문구를 썼다고 읽은 걸로 기억한다. 아주 오래전에 읽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문구가 인상적이라 메모를 해 뒀었다.



한때 겨우 존재했다가 지금은 영영 사라진 제주의 ‘모살’과 용인의 ‘플래닛 조르바’로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몇 있다. 제주의 카페 겸 선술집 모살은 4년, 죽전의 펍 플래닛 조르바는 3년을 혼자 운영했다.


몇몇은 그때의 분위기와 공기를 그리워하고 당시의 에피소드들을 종종 소환하지만 이미 사라진 공간에 대한 회상일 뿐이다. 앞선 저 문장이 비로소 와닿는다.


한때 겨우겨우 존재했다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환되는 동안은 거짓말처럼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없는 데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나라는 존재도,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부스러기들도, 우리 자신 자체도 한때 겨우 존재했다가 영영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소환되는 순간에는 잠시 더 존재했다가 잠잠하게 소멸할 것이다. 결국 소멸할 것이라는 허무보다는 잠시나마라도 존재했다는 것 자체를 대견하게, 감사하게 여겨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 플래닛 조르바,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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