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강진 어느 살구밭에서
겨울날, 영화감독 상진이가 서른을 앞두고 서른 앓이를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차분히 들어보니 내가 겪었던 지독한 서른 앓이와 거의 같은 증세였다. 대한민국의 많은 청년들이 앓는 서른 앓이의 원인 바이러스는 김광석의 노래 때문임이 분명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벌써 서른 살이 되어버린다는 허무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던듯하다. 스무 살이 되면서 어른이 되었다 믿었고, 서른 즈음이면 온전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그쯤이면 당당히 무언가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 믿은 기대가 낳은 실망일 게다. 당연히 기대할 수 있고 꿈꿀 수 있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당연히 아무것도 못 이룰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대학과 군대를 마치면 어느덧 20대 중후반이고 운 좋게 빨리 취업을 하더라도 곧바로 서른에 이른다.
몇년 내에 경제적 안정은 물론 직업적, 신분적 안정을 당연히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을 맞게 될 즈음에는 열심히 노력했다고 믿었던 자신의 20대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른 살을 시작으로 마흔 살, 쉰 살 특히 예순이 될 때는 그 십 년의 문턱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고 한다. 이렇듯 몸무게의 앞자리가 바뀌는 것만큼이나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것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상진이와 헤어진 후 지인을 만났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벌써 사춘기가 와서 참 힘들다고 했다. 지인의 하소연을 듣다가 이런저런 인생의 단계들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우리가 쉽게 말하는 사춘기가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한자를 찾아보았다.
思春期 (생각 사, 봄 춘, 때 기)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갱년기 노년기 같은 성장과 노화의 한 단계쯤인가하고 생각했는데 한자 구성을 보니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니. 이렇게 낭만적인 단계일 줄이야!
보티첼리의 그림 [봄]의 주제처럼 봄은 이성,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징그럽게 말 안 듣고 제멋대로인 시기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생동하는 단계에 이른 대견스러운 존재라니 놀랍고 새롭다.
일찍이 공자님이 이름 지은 약관, 이립, 불혹, 지천명 등은 왠지 그때까지는 꼭 그것을 해내야만 하는 무거운 숙제처럼 느껴지는 탓에 넘기 벅찬 십 년마다의 언덕들에 저 사춘기처럼 스스로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 시기를 보낸 후에 스물의 바다, 서른의 강, 마흔의 산, 쉰의 들판처럼 스스로 평가해 이름을 불러보면 어떨까.
나는 때론 숨차고 힘들었지만 여느 골짜기쯤에 작은 계곡이 가끔 있어서 좋았던 마흔의 산을 이내 넘고 들판처럼 보이는 곳의 시작에 섰다. 한두 번쯤은 들판의 어디쯤에서 야생화가 지천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들판이라 믿었던 것이 끝내는 사막일 수도 있다. 지나 봐야 알 것이다.
섣달, 들판의 초입에 서서 다가올 새로운 봄을 기분좋게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