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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벳 Jul 17. 2024

헬렌카민스키로 다시 찾은 자존감

엄마들은 왜 이 작은 존재에 열광할까



헬렌카민스키. 모자계의 명품. 한동안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엄마들,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엄마들, 초등학교 앞에서 하교할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의 머리 위에는 너나 할 거 없이 이 브랜드 선캡이 자리했다. 왠지 모르게 당당한 그녀들의 표정과 함께. 씻지 못한 얼굴이어도 화장을 하지 못한 민낯이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밀짚모자임에도 몇십만 원의 몸값을 자랑한다. 엄마들의 플렉스를 보여주는 작은 아이는 밀짚모자의 한계를 넘어섰다. 습기에 예민해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하지만 여름에는 구하기 힘들 정도. 오죽하면 한 계절 앞서서 구매한다는 말이 있을까. 이 모자는 뜨거운 햇살을 가리는 본래의 역할뿐 아니라, 엄마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단지 걸리는 건 부담스러운 가격일 뿐.



몇 년 전에 남편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헬렌카민스키 모자를 선물 받았다. 엄마들의 워너비 아이템이라 하길래, 그래 나도 한번 써보자는 생각으로. 몇 번 쓰고 다녔지만 나와는 맞지 않았다. 선캡 밴드 부분이 피부에 닿아 금세 땀이 배였고 수시로 흘러내리는 모자에 계속 손이 가기 일쑤. 이 불편한 걸 왜 쓰고 다니는 건지. 구석에 고이 모셔 두었더랬다. ( 결국 당근으로 팔아버렸다. 내놓자마자 냉큼 팔리더라 ) 그렇게 헬렌카민스키와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 여겼다.






마흔 앓이 시작인 주사피부염으로 화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처방받은 크림만 바르며 맨 얼굴로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다. 붉게 성난 피부는 나에게도 보는 이에게도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피부를 가리기 위해 결국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평소에도 모자를 잘 안 쓰고 다녔기에 쓸만한 것으로 사기로 결정. 찾아보다가 발견한 사진 한 장. 예쁜 밀짚모자를 쓴 사람의 우아한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여배우가 찍은 바자화보. 그녀의 머리 위에는 헬렌카민스키 모자가 얹혀 있었다.



이미지 출처 : 하퍼스바자 2022년 6월호 화보



아. 예쁘다. 나도 쓰면 저런 느낌이 날 수 있을까?  무심하게 툭 쓴 모자는 그녀의 아우라와 어우러져 빛이 났다. 그렇지만 몇십만 원의 가격은 역시 부담. 시선을 거두고 다른 모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눈에 들어온 아이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니, 다른 모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래. 이왕이면 마음에 드는 거로 써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지. 다른 걸 사도 결국 사게 될걸.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장바구니에 고이 담아 놓은 모자를 구매했다. 며칠 뒤 두 손에 살포시 들어온 예쁜  밀짚모자 하나. 이후로 늘 함께 다니는 분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고자 쓰고 다녔다. 역시 전보다 편하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잔뜩 성난 붉은 피부를 가리기에도, 머리를 감지 않아도, 심지어 세수도 못하고 급히 눈곱만 뗀 채로 등굣길에 함께 해도 괜찮았다. 생각보다 이 작은 아이가 꽤나 의지가 되더라. 게다가 다른 모자도 아니고 헬렌카민스키이니까. 나름 멋진 모자를 쓴 여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타인들의 시선에도 당당해졌다. 그제야 왜 그렇게 엄마들이 이 브랜드에 열광하고 너도 나도 쓰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전에는 난 모자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계속 써보니 나름 어울리는 거 같더라. 여기저기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자주 손이 간다. 써보고 나니 마음에 들어 다른 색상의 모자도 구입. 그날의 코디와 느낌에 따라 번갈아가며 쓰는 중이다. 왜 이제야 이 아이의 매력을 알게 된 걸까? 선캡의 안 좋은 기억은 편견으로 남았다. 나와 맞지 않으니 내심 거부감이 있었던 거다. 써보고 가까이하게 되면서 이 아이의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이곳 저곳에서 함께 하는 헬렌카민스키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두 번의 만남으로 상대의 진정한 내면을 알 수 있을까. 섣불리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거리를 두게 되면 그와 깊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편견과 주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게 되면 그를 진정으로 알아갈 수 없다. 당시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을지라도, 다시 만나면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그 안의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헬렌카민스키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그동안 다른 이들의 시선, 행동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자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가리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리는 효과도 있더라. 밖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은근히 주변을 살피느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나서 보이는 게 적어지니 비로소 시선이 정돈되었다. 훨씬 편하게 나의 세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저기 잘 어울리는 단순함이 좋다. 모자 한편에 작게 자리한 나뭇잎 모양의 로고도 앙증 맞고. 쓰고 있으면 은은하게 풍기는 밀짚모자의 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제는 쓰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더라.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자주 듣는다. 덕분에 얼굴이 참 작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


자신의 존재를 독특하게 꾸미고 드러내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이가 되고 싶어졌다. 단순하면서 심플한 멋을 아는 이가 되기를 바래본다. 여기저기에 어울리는 모자처럼 다양하고 유연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이 되기를. 한두 번의 경험으로 그게 전부인 듯이 판단하고 결론 내리지 않기를. 더불어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어, 나에게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을 바라보고 위로하며 따스히 감싸 안아주는 이가 되기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다정함을 지닌 이가 되기를 소망하며.






헬렌카민스키를 쓰며

나만의 우아함을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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